ADVERTISEMENT
오피니언 차이나 인사이트

중국이 보는 한류는…미국식 대중문화로 가는 징검다리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기사 이미지

임대근
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중국이 미국보다 못한 게 무얼까. 중국은 경제와 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미국의 뒤를 바짝 쫓고 있다. 한데 예외가 있다. 대중문화 산업이다. 미국이 중국의 서사시 ‘목란사(木蘭辭)’를 가져다 ‘뮬란’을 만들고 중국의 상징인 ‘쿵푸(功夫)’와 ‘팬더’를 결합해 ‘쿵푸팬더’를 흥행시키자 중국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졌었다. 그런 중국이 이제 정신을 가다듬어 문화 산업의 몸집과 맷집 키우기에 안간힘이다. 한류엔 큰 도전이다.

기사 이미지

보름 뒤 중국 상하이(上海) 디즈니랜드가 개장한다. 전 세계 여섯 번째이자 미국 밖에선 파리, 도쿄, 홍콩에 이어 네 번째다. 규모는 아시아 최대로 푸둥(浦東) 지역 700만㎡에 6개의 테마 구역이 들어선다. 여기엔 미키 마우스 등 디즈니 고유의 캐릭터는 물론 12간지(干支) 동물로 만든 중국 특유의 캐릭터 또한 등장한다. 상하이가 디즈니랜드를 허가한 건 2007년, 바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상하이 당서기로 있을 때였다.

그래서인가. 시진핑은 5월 초 시범 개장을 위해 중국을 찾은 로버트 아이거 월트디즈니 최고경영자를 만났다. 시진핑은 이 자리에서 “중·미 경제는 상호 보완성이 크다”며 경제 협력을 강조했다. 반면 아이거는 “미·중 인문 교류는 더욱 확대돼야 한다”고 화답했다. 두 나라가 경제와 문화를 고공에 띄우고 대화를 이어 간 셈이다. 중국이 상하이 디즈니랜드를 경제 문제로 포장한 데 반해 미국은 문화 문제로 모양새를 꾸몄다. 그러나 속내는 다를 것이다. 솔직히 말해 중국은 문화가 걱정이고 미국은 경제가 더 우려되기 때문이다.

| 세계 향한 중국 문화산업 전략은
중국 고유 전통만 고집하지 않고
할리우드나 한류 통 크게 가져와
자국 산업의 몸집과 맷집 키우기

기사 이미지

상하이 디즈니랜드의 탄생은 중국의 문화산업 전략을 대변하는 좋은 예다. 중국은 현재 밖으로는 할리우드와 한류의 거센 도전을 막아내면서 어떻게 하면 해외로 진출할 것인가를 고민 중이다. 또 안으론 자국 문화산업의 몸집과 맷집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의 숙제를 안고 있다. 상하이 디즈니랜드는 바로 미국이나 한국 등으로부터 오는 외부 압력에 중국이 어떻게 대처하고 또 해외 진출은 어떻게 해나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보여준다.

상하이 디즈니랜드와 같은 테마파크는 문화콘텐트 산업의 꽃이다. 영상과 공연, 전시, 게임, 축제 등 장르를 망라하는 종합 콘텐트이기 때문이다. 중국에도 자국 기술과 콘텐트를 활용한 테마파크가 없는 건 아니다. ‘삼국지’나 ‘서유기’ 촬영 세트를 전용하는 식이었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알린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이국적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원하는 소비자에겐 단조로웠다. 그래서 중국은 자국 콘텐트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디즈니와 같은 해외 문화 원천을 과감하게 가져다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는 시진핑이 상하이 디즈니랜드 인허가 과정을 소개하며 “다른 관리는 중국 문화에 기반을 둔 프로젝트를 지지했지만 나는 다양한 문화에 바탕을 둔 엔터테인먼트 시장이 필요하다고 보고 디즈니랜드에 찬성표를 던졌다”고 밝힌 데서 잘 드러난다. 이제 중국의 전략은 자국 것만 고수하지 않고 외국의 선진 대중문화도 통 크게 갖다 쓰자는 쪽으로 바뀌었다.

중국이 볼 때 세계는 미국식 대중문화에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중국의 문화산업 전략은 중국 것만 주장하지 말고 미국식 대중문화를 발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수정돼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한류다. 한류는 미국식 대중문화를 아시아 내부로 끌어들인 좋은 모델이다. 미국과 곧바로 겨루기엔 힘이 달리는 상황에서 한류는 좋은 징검다리가 되는 것이다. 공동의 가치를 구현하면서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는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의 과감한 한류 수용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제 미국 문화산업에 직접 투자하고 있기도 하다. 2015년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을 여는 첫 로고의 주인공은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였다. 또 미국 영화 ‘마션’에선 중국인의 역할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과거 할리우드 영화에서 중국인은 늘 부정적 역할을 하는 이른바 ‘노란 얼굴 연기’가 전형이었다. 한데 마션에서는 중국인이 주도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긍정적 캐릭터로 떠올랐다. 미국 문화산업이 중국 자본에 길들여지고 있는 단면을 읽을 수 있다.

중국 문화산업의 또 다른 걸림돌은 ‘중국 당국의 강력한 의지’다. 이 당국의 의지는 중국 문화산업의 강점이자 약점이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강점으로서의 의지는 정책 개선과 자본 투자 등을 꼽을 수 있다.

기사 이미지

2009년 국무원이 ‘문화산업진흥계획’을 발표한 뒤 지난해를 예로 보면 중국 영화는 무려 686편이 제작돼 440억 위안의 박스오피스 수입을 올렸다. 2014년 대비 36% 넘게 성장했다. 집계 가능한 도시의 관객 수는 연간 12억6000만 명으로 이 역시 전년 대비 34% 넘게 컸다. 스크린 수는 연간 8035개가 증가해 하루에 22개씩 새로 생겨난 셈이다.

기사 이미지

문제는 약점으로서의 의지인데 이는 중국 당국이 자신의 체제를 위협하는 사회 비판이나 부정적 요소에 대해선 철저하게 차단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중국 공산당 선전부의 높은 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 한데 최근 중국의 콘텐트들은 자발적으로 나름대로의 길을 찾으며 이 같은 중국 당국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어 눈길을 끈다. 방법은 두 가지로 하나는 철저하게 오락화로 나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교묘하게 사회를 풍자하는 것이다.

기사 이미지

우선 오락화에 성공한 예로 2014년 첫 시즌을 방송한 ‘스타 셰프 쇼(星廚駕到)’를 꼽을 수 있다. 이 오락프로그램은 스타들이 서로 요리 대결을 펼치는 내용으로 지난해 두 번째 시즌을 제작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는 한국 예능프로그램 포맷 수입 의존도가 높아 자체 제작 능력은 부족하다는 말을 듣던 중국 방송의 약점을 말끔히 씻어주는 쾌거로 평가되고 있다. 화면과 스토리 구성, 편집 등에 있어서 자신만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예능프로그램 고유의 특성만을 강조해 정치나 사회 비판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기사 이미지

중국 애니메이션‘시양양과 후이타이랑’

반면 교묘한 사회 풍자를 이용해 성공하는 프로그램도 많아지고 있다. 2005년 첫 방송된 애니메이션 ‘시양양과 후이타이랑(喜羊羊與灰太狼)’은 올해 14번째 시리즈를 내놓았고 최고 시청률 17.3%를 기록하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이는 전형적인 선악 대결 구도를 어린이들이 좋아할 만한 양과 늑대라는 캐릭터로 바꿔놓았다. 양과 늑대의 선악 구도는 보기에 따라선 얼마든지 중국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갈등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 중국의 거센 추격 직면한 한류는
중국에 자양분 제공 역할 넘어
‘문화기술’ 개발 위한 투자와
문화 콘텐트 전문 인력 양성해야

기사 이미지

TV 드라마‘랑야방’(사진 위), 웹 드라마‘중독’(아래)

또 국내에도 소개돼 큰 인기를 얻고 있는 TV드라마 ‘랑야방(琅?榜)’도 주목해야 한다. 양(梁)나라를 배경으로 조정의 암투를 그린 랑야방은 지난해 첫 방송 이후 각종 인터넷 영상 재생 사이트에서 무려 35억 번 넘게 클릭됐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애국’ ‘민족’ 등의 가치로 포장되지만 그 안엔 현실 정치에 대한 강력한 비유와 비판이 들어 있다는 게 많은 이의 평가다.

그런가 하면 올해 선보인 웹 드라마 ‘중독(上?)’은 청소년 동성애 멜로를 그리면서 주목받고 있다. 관련 웹사이트에는 무려 170만 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이는 사회주의가 금기시하는 소재인 동성애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처럼 중국 콘텐트는 당국의 강력한 개입 아래서도 스스로 이데올로기를 포기하는 오락화로 나아가며 상업화를 극대화하는 전략을 펼치거나, 아니면 주류 이데올로기를 적극 수용하는 것처럼 위장하면서 실제 내부적으로는 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형식으로 탈출구를 마련하는 등 다양한 노력으로 자신의 경쟁력을 키워 가고 있다.

문제는 우리다. 한류는 1990년대 중·후반에 시작돼 20년 가까이 아시아 대중문화를 석권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아시아에서 대중문화의 흐름은 주기적으로 변해왔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문화의 유입으로 형성된 아시아 대중문화의 첫 번째 주인공은 50년대 이후 일본이었다. 60년대 이후엔 홍콩 영화와 ‘캔토니즈(중국 광둥어) 팝’이 한 세대 넘게 풍미했다. 한류는 그 뒤를 이었다.


▶관련 기사
① 중국으로 달려가는 한국 문화산업…유출인가 진출인가
② "한류 예능=한국 예능" 중국 창조산업을 키우고 있다



이제 중국 대륙의 문화 콘텐트가 한국을 따라 배우면서 일부 분야에선 오히려 우리를 추월하고 있다. 우리는 ‘쉬리’가 한국 영화 중흥을 이끈 계기가 됐다고 본다. 중국은 지금 그 계기를 만들어내기 위해 질주하고 있다. 여기저기서 끓어 올라오는 기포들이 비등점에 이르면 이제 ‘만다린(중국 표준어) 팝’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한국은 부상하는 중국 문화 콘텐트에 그저 자양분만을 제공하는 역할을 넘어서야 한다. 자본과 기술, 인력 가운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기술과 인력이다. 문화기술(CT) 개발을 위한 과감한 투자와 문화 콘텐트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우리의 당면 과제가 돼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대근 한국외대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