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꺽고 내부단결 계속됐으면…"|신민 전당대회를 방청하고…작가 김 주 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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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사람을 다루고, 정치에 종사하는 인물로서는 자기고집을 꺾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플라톤」의 말에 의하면 정치인은 이해해주지 않는 고독속에 묻혀 오래 고생하며 인내해야 하는것인데 어리석은 자는 이것을 매우 값싼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적혀있다.
이 말은 이상하게도 오늘날의 정치를 겪고있는 백성들이 정치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인상 싶다.
옛날의 국회의사당, 지금은 세종문화회관별관으로 이름이 바뀐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장으로 가면서 나는 과연 이들이 무엇을하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해보려고 애썼다.
그들은 개인의 영달보다는 우리나라의 먼 장래를 생각해서 내다보는 대의에 살아야 한다는것과 당보다는 국민을 더욱 중하게 여기는 정치인으로서 겸양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것은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갖고있는 그들에대한 염원이다. 그것과 더불어 우리가 특히 신민당에 바라고 있는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래도 안정을 유지하는 가운데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우리들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일께다.
우리가 신민당에 바라는 변화는 견제와 직언과 소신일 것이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는가. 이상하게도 우리의 풍토는 가난에 찌들고 세파에 시달림을 받는 사람들일수록 여당보다는 야당에 더많은것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 많게 되었다. 그러기에 야당이라는 집안에 분란이 없기를 바라고 그들의 시선이 항상 우리의 언저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응석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응석할때가 없지 않았고 심지어는 부대낌을 끼칠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보면 그들, 특히 한국의 야당정치인들만큼 갈등과 질곡을 겪고있는 사람들도 흔치는 않을것이다.
그들의 마마자국과 탄흔자국은 살아도 못살아지는듯한 서민들의 생활감정과 생활의식과 상통하고있기에 연대감의 한쪽 끝머리에서 항상 염려스런 존재로 남아있는 것일께다.
그들의 파벌이 우리에게 눈살을 찌푸리게하고 추진력의 둔화가 우리를 실망시키기도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기를 원하기에 우리와 더불어 슬픈것이다.
대회장안으로 들아감에 푹푹찌는 이 염천 좁은 공간에 8백여명의 대의원들이 활활 부쳐대는 부산스런 부채소리가 오늘이라는 정치명제에 처해있는 신민당의 처지를 한마디로 말해주는듯 했다.
그리고 나를 대의원인줄 잘못알고 건네주는 봉투속에 들어있는 조그맣고 초라한 행주수건이 그들의 가난을 대변해 주는것 같았다. 극성스럽기에 짜증나는 보도진들의 취재경쟁속에서 총재선거가 있었고 드디어 이민우총재가 재추대되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분을 좋아한다.
표정이 호들갑스럽지 않고 달변이 아니다. 말 잘하는, 그리고 미사여구가 많은 오늘의 야당가에서 유독 이분만은 말수가 적고 다소 어눌할 지경이지만 이분의 풍모에는 집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대들보를 연상케하기 때문이다. 『집안의 형제는 같은날 죽을수없지만 그러나 한날 한시에 죽어 심지어는 같은 무덤에 묻힐수 있는 것은 동지뿐』이라는 그이의 수락연설을 듣는동안 장내는 박수의 도가니였다. 패자인 김재광씨에게 연설의 자리를 내어주는 아량도 볼만한 것이었고 그의 연설때보다 더 열렬한 박수와 환호를 받았던 김재광씨의 연설도 인상적이었다.
승리한 사람과 승복하는 사람이 함께 손을 잡아 높이 쳐들어 카메라의 플래시를 함께 받는 광경을 객석에서 바라보면서 나는 한국야당의 전통적인 면모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쁨을 가졌다.
가뭄으로 여올이 메말라있는 시냇가를 가리키면서 다리를 놓겠다는 공약을 하는것이 정치가라고 불릴만큼 정치가란 허황한 사람들이라고 인식되었던 시대도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정치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명확한 현실에 그들의 두발이 버티고 있지 못하는 이상 그들은 언제 정치무대의 장막뒤로 사라질지 모르는 운명을 생각해야 한다. 야당의 파벌은 된장의 풋고추와 같은 궁합으로 따라다니는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것이 종결의 장에 가서는 새로운 승복과 이해로 막내려주기를 우리는 바라고 있다. 그것이 이번의 신민당 전당대회의 총재선거에서 다시 확인되었을 때 정치라는 마당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살아가는듯한 나에게도 흐뭇했던것은 무슨 일일까.
공자의 수제자였고 애제자였던 안회는 40세란 젊은 나이로 일찍 죽었다. 안회가 죽자 공자는 그 애석함이 통곡에 이르렀다. 공자는 그를 위해 「불천노 불이과」라는 글을 『논어』에 남겼다.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 옮겨 풀지 않으며 자기의 과오를 두 번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이 명구는 천노와 이과를 하지않았던 안회의 성품에 깊이 감동하는 말이다.
우리가 오늘의 신민당에 바라는 마음도 이글에 깊이 담겨있다고 봐야한다.
노여움이 있을때 그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삭히고 소화하는 슬기와 두번 다시 과오를 범하지 않는 신뢰를 다져가는 신중한 몸가짐은 우리가 신민당에 바라는것의 전부일 것이다.
그들은 노출되어 있다. 사사건건의 사건들이 매일매일 신문에 깨알같이 보도되고 있는 오늘 그들은 속곳벗긴 여인네처럼 노출의 슬픔속에 살고있다.
그러나 그 노출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신민당에는 저력으로 작용된다는 것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푸념해서도 안될 것이다. 가난한 나무는 그렇게 자라야 쓸만한 재목이 될수 있기때문이다.
냉방장치가 되어있지않은 실내는 부채를 부치지 않으면 견뎌낼수 없을 정도로 후덥지근했다. 총재의 수락연설에서 농촌문제가 거론될때마다 객석에서는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그러한 말들이 잠시 더위를 잊게한다.
그러나 그것이 잠시 더위를 잊게하는 청량제로서의 구실로 끝난다면 오늘의 야당도 한줄기 청량제로서 끊일 공산은 크다. 그것이 구호로 끝나서도 안될 것이고 한때의 박수소리를 유도하기위한 편법으로서 사용되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그들의 구호와 박수소리와 높은 목청은 역시 파고가 높아 바람잘날없는 오늘의 정치사에 굳게 발판을 내리고 있어야할 것이다.
전당대회는 부총재의 선거를 두고 옥신각신 잡음이 있었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데도 그들은 아직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곳은 축제의 장이 아니라 해결의 장소로서 어딘가 미흡되었기에 아직도 그들은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일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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