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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질풍노도의 황혼, 나이 들수록 사랑받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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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는 마음이 고민이라는 7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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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마음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을까) ‘7학년 1반’ 할머니입니다. 나이 들면서 과거나 현재에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자꾸 미워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면서 잠을 설칠 때가 많아요. 아침이면 내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을 사라지게 해달라고 해님·달님·별님께 기도합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이러다가 치매가 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고요, 건강을 해칠까 두렵습니다. 선생님의 진단을 받고 싶습니다.

A. (기억력 떨어져도 감성은 발달해요) 7학년 1반, 71세 어르신의 고민 사연입니다. 진단을 받고 싶다고 하셨는데, 우선 걱정하시는 치매는 없는 걸로 판단됩니다. 치매 진단에서 주관적 기억력 감퇴보다는 객관적 기억력 감퇴 소견이 더 중요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내가 치매를 걱정하는 것보다 주변에서 볼 때 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게 치매 진단에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치매가 찾아온 어르신 중엔 스스로 괜찮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족이 보기엔 기억력 저하 등 인지 기능이 뚜렷하게 떨어졌는데 말이죠. 반대로 자기가 치매일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사람을 검사해 보면 치매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치매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치매가 아니라는 증거인 셈입니다.

치매보다 치매에 대한 걱정이 나를 더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삶과 죽음을 초월하게 되고, 걱정도 줄고, 마음도 한결 여유로워질 거라고 젊었을 때는 생각합니다. 영화 속 캐릭터를 보면 흰 수염을 휘날리며 세상에서 자유로워지는 도인 같은 어르신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실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찾아오는 일반적인 심리 변화는 정반대입니다. 눈은 침침해지고 기억력도 떨어지고 팔다리 힘은 빠지는데, 감성 반응은 점점 섬세해집니다.

그래서 어르신들이 더 노여워하고 걱정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부정적인 감성은 부정적인 생각을 일으키고,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오늘 사연처럼 잠도 설치게 됩니다. 마음과 몸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걱정이 많아지고 수면의 질이 떨어지면, 몸의 건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사라지게 하기 위해 해님·별님·달님께 기도하는데도 잘 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먼저 한 살 한 살 나이가 쌓여 가면서 찾아오는 심리 변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더 기뻐하고 더 슬퍼하고, 더 분노하고

우리 모두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 시기를 아는 이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죽음에 대한 심리 반응이 나이에 따라 다릅니다. 죽음이 멀리 있다 느껴지는 젊은 시절엔 죽음에 대한 걱정이 적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을 그냥 흘려보내기 쉽죠. 반면 나이가 들어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게 증가하는 것을 어르신들의 심리에서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정말 ‘호상’(好喪)이란 게 있을까 싶습니다. 망자를 떠나 보내는 가족들이 스스로 위로하려고 호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 본인이 ‘아, 호상이다’ 하며 눈을 감는 이는 없을 듯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이가 들수록 삶에 대한 애착이 커져만 가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삶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살 만큼 살았다’라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진짜 마음이 아닙니다. 80세 어르신께 ‘얼마나 더 살고 싶은지’ 물으면 ‘뭘 더 살아’ 하십니다. 그래도 또 물으면 ‘남 사는 만큼 살고 싶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몇 살까지인지 또 물으면 ‘100세 이상’이라고 말하는 어르신이 요즘 적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삶에 대한 애착이 증가하면서 동시에 순수한 가치에 대한 열망도 더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면증 같은 스트레스 증상을 치료해 드리고 나면 ‘이제 불면증은 치료되었으니 진짜 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오’라는 어르신들이 계십니다. 그게 무엇인지 되물으면 ‘나 요즘 너무 사랑하고 싶어’라고 하십니다. 나이 들어 주책없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랑은 젊은 사람만의 것이 아닙니다. 70세 넘어 만난 남녀 어르신이 때론 젊은이보다 더 열렬히 사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죽어도 좋아’라는 노년의 사랑에 대한 영화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뭉클합니다. ‘too young to die!’. 죽기에 너무 어리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공을 위해 열심히 사는 본질적인 동기가 무엇일까요. 나를 근사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겠죠. 왜 근사한 사람이 되고 싶을까요. 더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무의식의 욕구가 강력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즉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그 욕구가 커지기에 작은 자극에 더 기뻐하고 더 슬퍼하고 더 분노하게 됩니다. 이런 변화를 어떻게 해석하고 대응하면 좋을까요.

세월이 우리를 예술가로 만든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이가 들면서 삶에 대한 애착과 순수한 가치에 대한 열망이 커집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삶을 더 잘 즐길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실제 어르신들을 보면 분노 반응이 증가하고 쉽게 슬픔에 잠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실례로 지난해와 똑같이 부모님 생일에 대접을 했는데 갑자기 ‘왜 나를 진짜로 공경하지 않느냐’고 역정을 내셔서 당황했다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진짜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가 커지다 보니 섭섭한 마음도 더 쉽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무뚝뚝한 남자도 예술가의 섬세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노년의 심리 변화입니다. 이 섬세한 감성은 치매 이후에도 유지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중증 치매로 며느리인지 딸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뇌 기능이 상실된 사람이라도 주변에서 누가 나를 가장 진심으로 위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15세기 이탈리아 미학자 알베르티는 ‘인간은 불멸의 신 같은 지혜와 이성과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중년 이후의 삶이 없었다면 그런 건 결코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노화가 시작되는 중년 이후의 삶이 인류 문화와 역사 창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긴 노화 과정을 겪는 인류만의 특징이 다른 영장류와 달리 문화를 창조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심리 변화를 진화심리학적 관점에서 설명한 미국의 동물학자, 베인브리지의 의견도 흥미롭습니다. 중년 이후 머리 빠지고 배 나오고 성 기능도 약화되는 변화가 찾아오면 사랑과 인생을 다룬 문화에 대해 몰입하고 그 문화를 젊은 세대에 물려주는 것에 더 많은 에너지를 투입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는 게 그의 의견입니다. 사랑을 하고 싶다는 것이 젊은이들과 진짜 사랑을 놓고 경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겁니다.

진화가 오직 생식에만 집중돼 있는 다른 영장류와 달리 사람은 생식과 별도로 문화의 창조 계승이라는 본능의 욕구에 충실하도록 진화했습니다. 기억력 같은 인지 기능은 떨어져도 감성 시스템의 예민도는 증가하는 것도 문화에 대한 몰입을 증가시키기 위한 노년의 변화라는 흥미로운 설명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나이 들며 더 느껴지는 외로움과 슬픔은 내가 예술가가 되었다는 증거인 셈입니다. 피부에 주름은 늘어가지만 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은 젊은이보다 강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외람되지만 저도 20대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꽃들의 아름다움이 요즘 들어 눈에 들어옵니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서글퍼 하지 말고 드디어 찾아온 진짜 세상을 즐기는 능력을 잘 이용하는 것이 인생 후반부의 행복 전략이 되면 좋겠습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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