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금자탑」은 영원히 빛나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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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비구름 사이로 기울어가는 햇빛이 유난히 쨍쨍합니다.
내고선생께서는 길고도 짧은 인생의 여로를 마치시고 이미 영계로 떠나셨습니다.
선생님은 지나온 그 기로의 의미와 저마다 갖는 숙명의 뜻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아직 저희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지구촌에 대해 그리 짙은 애착을 느끼고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행복이라는 그림자를 쫓아 허덕이며 살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시절 선생님과 저는 퍽 다정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홍익대에서 함께 미술실기 지도를 맡았던 시절이었지요.
제가 좀 먼저 자리잡고 있었던 까닭으로 선생을 모시기 위해 처음 만나뵈온 자리에서 이력서를 한통 주십사고 했는데 마산 다녀와서 주마던 선생님의 말씀이 퍽 저를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하는것거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여류화가의 꿈을 품은 제가 아직 여학교 제복을 벗기전 어느 얄팍한 미술지에 당시로서는 희귀했던 컬러판의 그림이 실려 있었습니다.
쇼윈도안에 휜색이든가, 아니면 연분훙 철쭉화분이 놓인 향수서린 모던한 채색화였는데 작가명이 박생광이었읍니다.
선생을 마지막 뵌것이 어느 표구사에서입니다. 선생 키보다 큰 5백호 가량된 두루마리를 찾으러 오셨는데 주인이 대금을 빨리 해결해 달라는 말을 듣고 저는 한편 서글프면서도 진짜 화가의 숙명같은 향수에 젖었습니다.
어디서 그런 대작을 하실 정력이라기보다는 영력이 솟으셨습니까…
선생님은 후배에게 좋은 선물을 남기고 보다 좋은 세계로 떠나셨습니다.
다시 태어나서 선생님을 또 한번 만나뵙고 싶습니다. 천경자<동양화가·예술원정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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