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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계춘할망'으로 살펴본 창감독 작품 세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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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할망의 끝이 없는 내리사랑. 12년 만에 만난 금쪽같은 손녀 혜지(김고은)를 온전히 품어 주는, 바다만큼 큰 계춘(윤여정)의 사랑에 눈물이 절로 흐른다. 담백하고도 진득하게 감정의 파고를 끌어 가는 힘이 놀랍다. ‘계춘할망’(5월 19일 개봉)은 창감독(41)의 세 번째 장편이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명성을 날리던 그는 호러영화 ‘고死:피의 중간고사’(2008, 이하 ‘고사’)로 데뷔했다. 2014년엔 ‘표적’으로 제67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에 초청받은 바 있다. 독특한 이력 때문에 영화계에선 이단아로 불리기도 했다. 그에게 ‘계춘할망’은 또 하나의 이정표가 될 듯하다. 다양한 장르 영화를 탁월하게 소화해 내는 연출자임을 각인시킨다는 점에서다. 그와 나눈 긴 대화를 바탕으로 눈여겨봐야 할 창감독 영화의 특징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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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화 `계춘할망` 스틸컷]


1. 어떤 장르에서든 드러나는 가족애


 창감독은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으로 ‘계춘할망’을 시작했다. 늦둥이였던 그는 알츠하이머를 앓던 노모를 제대로 모시지 못하고 떠나보낸 후, 세 살배기 아들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어머니를 향한 죄송스런 마음과 더불어 ‘내 아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해 주는 할머니를 영영 모르겠구나’ 하는 안쓰러움을 느꼈다. 그즈음 한 대학에 시나리오 작법 강의를 나갔다 읽은, 허아름 학생이 쓴 ‘계춘할망’ 트리트먼트가 그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허아름을 정식 작가로 기용해 함께 초고를 썼다. 2012년의 일이었다. 창감독이 ‘계춘할망’에서 본 건 하해(河海)와 같은 사랑이었다. 그건 혜지처럼 엇나가기 쉬운 10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영화계 이단아에서 믿고 보는 감독으로

“7남매의 대가족과 살며 가족애를 몸으로 배웠다. 결혼 후,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 관계지만 점점 가치가 퇴색되어 가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표적’에서 살인 병기 백여훈(류승룡)이 악마 같은 송기철(유준상)을 쫓은 건 장애를 가진 동생 백성훈(진구)의 죽음 때문이었다. 결말에선 백여훈이 이 사건에 얽힌 의사 이태준(이진욱)과 형제 같은 사이가 된 것을 강조했다. 쉴 새 없이 빠르게 달려온 영화는 결국 따뜻한 가족의 품에서 멈춘다. 창감독에게 가족은 “큰일이 나도 돌아가야 할 일상”이며 “어떤 장르에서든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중요한 화두”다.


2. 틀에 박히지 않은 여성 캐릭터


 ‘계춘할망’이 반가운 건 할머니와 손녀, 두 여성을 영화 전면에 내세워서만은 아니다. 극 중 온 힘을 다해 팔뚝만 한 장어를 잡은 계춘. 어린 혜지가 크레파스를 사 달라고 하자, 그는 어렵사리 얻은 장어를 툭 내주며 그 값을 치른다. 억척스럽지만 따뜻한 여성상이 나타나는 대목이다. 창감독이 배경을 제주도로, 할망을 해녀로 설정한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 있다. “제주도의 해녀 할머니들은 고된 물질을 하며 꿋꿋하게 살림을 해낸다. 또 해산물의 산란기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물질을 하지 않고, 해녀 각자의 영역을 지키며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엔 ‘내 새끼 키울 만큼만 (해산물을) 딴다는 원칙’이 있다. 정말 아름답지 않나. 자연과 더불어 사는 ‘어미’, 제주도는 어미의 땅이다.” 다른 지역에서 촬영했다면 받을 수 있던 제작 지원을 포기하면서도 배경을 바꾸지 않은 이유다.

혜지 역시 불량 청소년으로 거리를 떠돌면서도, 친구 민희(박민지)와의 의리를 지킨다. 남성들이 활개 치는 ‘표적’에도 인상 깊은 여성 캐릭터가 있었다. 바로 정영주(김성령)와 박수진(조은지) 형사 콤비다. 칼 같이 떨어지는 단발머리를 한, 차디찬 인상의 유능하고 민첩한 수사관 정영주. 후배 박수진은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른다. 이렇게 서로 연대하는 여성은 근래 한국 상업영화에서 쉽게 볼 수 없었다.

“마초적인 영화를 만들 때도 여성을 연약하게 그리고 싶지 않다. 여성은 초인적 힘을 지닌 존재다. 결혼 후 아내를 보며 저 강인함은 어디서 나올까 자주 생각한다. 여성을 어떻게 그릴지, 여성과 남성이 적대시하지 않고 공생하는 모습을 어떻게 담을지 늘 고민한다.” 창감독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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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영화 `표적` 스틸컷]


3. 참신한 캐스팅이란 이런 것


‘표적’과 ‘고사’는 연출 면에서 대단히 새롭거나 특출 난 건 아니다. 특히 ‘표적’은 적당히 힘을 빼고 주어진 여건에서 가능한 정도를 지켜 완성도를 높였다는 인상이 강하다. 두 영화가 평단의 호평을 받진 못했지만 제법 흥행한 이유다. 영화에 참신함을 더한 건 독특한 캐스팅이다. ‘표적’에서 가장 눈길을 끈 이는 악역 송기철을 연기한 유준상. TV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 KBS2)에서 ‘국민 공처가’로 등극한 그가 극악무도한 비리 형사를, 그것도 훌륭하게 해냈다. ‘계춘할망’에선 도도하고 깐깐한 이미지의 윤여정에게 토속적인 계춘 역을, 소름끼치는 악역을 도맡던 김희원에겐 계춘을 극진히 모시는 착한 이웃사촌 석호 역을 맡겼다. ‘똥파리’(2009, 양익준 감독) 이후 줄곧 깡패나 건달을 연기한 양익준은 혜지의 미술 교사로 등장한다. 놀라운 건 모든 배우가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극에 완전히 녹아든 것이다. 창감독은 “배우의 이미지는 선입견이다. 배우에게서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라 말했다. 그가 촬영 현장에서 김희원에게 연기 지도를 하려 하자, 윤여정은 “저 사람 내버려 둬도 혼자 잘해. 누구보다 자기의 껍질을 벗고 싶은 사람일 거야”라 말했다고. 창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비슷한 역할을 자주 맡는 배우는 자기도 모르게 관성대로 연기한다. 익숙하지 않은 역할을 맡으면 진실한 감정을 끌어올리려 노력할 수밖에 없다. 배우를 면밀히 관찰하면 숨겨진 얼굴이 보인다. 그런 캐스팅은 감독과 배우 모두의 기쁨이다.”


4. 군더더기 없이 기본으로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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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감독

  ‘고사’과 ‘표적’ 그리고 ‘계춘할망’까지, 세 영화는 각각 호러·액션·드라마로 장르가 모두 다르다. 제작 과정을 보면 ‘고사’는 “어떻게든 영화계로 넘어와야겠다는 생각에 두 달 만에 시나리오와 캐스팅 준비를 해 찍은 영화”(magazine M 62호)고, ‘표적’은 감독이 교체된 후 급히 투입돼 두어 달 만에 촬영 준비를 마친 작품이었다. 주어진 조건에 맞춰 그는 “선택과 집중이란 전략을 썼다”고 했다.

경희대학교 영극영화학과를 다닌 창감독은 영화감독을 꿈꾸다 생활고에 시달려 뮤직비디오로 선회했다. 그러는 중에도 영화 연출 감각을 잃지 않으려 30분짜리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뮤직비디오가 시(詩)라면 영화는 소설 같다. 영상의 컷과 컷을 이어 붙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계춘할망’은 드라마를 매끄럽게 만드는 기본에 충실하고자 했다.” ‘계춘할망’이 비극적 사건 없이도 가슴 벅찬 감동을 주는 건 그 때문이다. “군더더기를 걷어 내고 오롯이 영화의 주제를 남기는 데 힘을 쏟았다. 시쳇말로 조미료라 하는, 감정 과잉의 요소를 덜 넣으면서도 관객에게 재미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그 방법은 장르나 소재, 이야기마다 다르다.”

돌이켜 보면 ‘고사’는 독특한 설정이, ‘표적’은 공들인 액션이, ‘계춘할망’은 배우들의 진정성 있는 연기가 돋보여 역설적으로 감독이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창감독은 빼어난 연출력으로 단번에 부각되기보다 꾸준히 자신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는 감독이다. 앞으로도 그가 다양한 상업영화를 완성도 있게 연출할 것이라 기대되는 이유다. 그의 차기작은 중국 제작사와 협업한 ‘치명도수:RESET’(하반기 중국 개봉 예정)이다. 이번엔 어머니 가 아들을 구하려 고군분투하는 SF 액션이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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