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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장기 침체와 정책 실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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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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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일
본사 고문·전 재무장관

2007~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와 뒤이은 유로존 경제위기 이후 세계 경제, 특히 선진국 경제는 중앙은행의 대폭적인 양적완화와 초저금리 시책에도 불구하고 8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저조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30년대 말에 제기됐던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론’, 즉 구조적 요인에 의한 저성장세가 장기간(적어도 수십 년) 지속된다는 가설이 다시 등장하게 됐다. 특히 세계적 석학으로 경제 정책 분야에 영향력이 상당한 로런스 서머스(미국 전 재무장관) 하버드대 교수가 미국 경제를 위시한 주요 선진국 경제는 이미 이러한 장기침체 국면에 진입해 있을 수 있다는 논거를 제시하고 나선 이후 장기침체론에 관한 찬반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선진국의 정책 실패로 25~40년간 장기침체에 대비해
4차 산업화에 맞게 구조조정·4대 부문 개혁 서둘러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은 장기침체론이 내포하고 있는 주요 정책적 시사점이다. 장기침체론은 크게 수요와 공급, 두 측면에서 주요 원인을 찾는다. 물론 서머스는 케인스적 시각에서 총수요 부족을 그 주된 원인으로 꼽는다. 따라서 그는 총수요 진작을 위해 제로 금리의 한계에 부닥쳐 있는 금융정책보다 국채를 발행해서라도 재정을 통해 사회간접자본 투자와 교육 부문 투자를 대폭 늘려야 함을 강조한다. 장기침체를 극복하려면 어느 정도의 추후 금융 불안정의 리스크는 감내해야 한다고 본다. 어쨌든 서머스는 장기침체도 정책의 성패에 따라 판가름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일본 경제의 잃어버린 20년도 따지고 보면 정치 지도력 부재에 따른 정책 실패에 기인한 것이었다. 항간에서는 우리 경제는 노령화 등 경제구조적 측면에서 잃어버린 20년의 일본과 비슷해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일본의 전철을 밟게 된다면 그것은 경제 구조의 유사성보다 오히려 정책 실패의 결과로 봐야 한다. 그래서 일본의 정책 실패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일부 학자는 과거 제1, 2차 산업혁명과 같이 대폭적 생산성 향상을 가져올 수 있는 발명과 혁신력 부족에 따른 성장잠재력 약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에 더해 인구의 노령화, 노동시장 참여율의 저하, 교육 수준의 저하, 소득불평등과 높은 정부 부채 비율 등을 성장잠재력 약화 요인으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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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용석]

대대적 발명과 개혁이 없어 생산성 향상이 저조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는 이들의 주장을 많은 전문가는 최근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소위 제4차 산업혁명에 비춰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과거 200여 년 동안 기술 발전과 생산성 향상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예측이 한두 번 빗나간 것이 아니었음도 지적한다. 그리고 이들은 빠른 기술혁신에 따른 성장잠재력 향상과 적절한 정책으로 장기침체 불가피론자들이 우려하는 구조적 장애 요인도 상당 수준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 들어 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대공황과 세계대전을 겪은 과거 ‘철과 밀의 경제’ 시대에 주로 양적 생산능력 추정을 위해 만들어진 국내총생산(GDP) 체계와 생산성 추계 방법이 오늘날의 경제 현실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 실상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평가하도록 해 장기침체론까지 등장하게 됐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빠른 기술 발전에 따른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의 출현, 질적 향상, 그리고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의 출시와 동시에 크게 떨어지는 가격·비용 등을 고려할 때 GDP와 생산성 통계는 경제활동 수준과 소비자의 복지 향상 지표로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문제는 과거에도 제기돼 왔다. 그러나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더욱 심각한 것임에 분명하다.

어쨌든 수요 측면에서 유발될 수 있는 장기침체는 적절한 정책으로 사전에 어느 정도 대응할 수 있으며, 발명과 기술혁신 부진에 따른 저조한 생산성 향상으로 초래될 수 있는 장기침체의 가능성은 있으나, 기술혁신의 속도에 비춰볼 때 그 확률은 낮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측면에서 ‘만약 미국이 장기침체를 겪게 된다면 이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며, 다시 말해 정책 실패의 결과라고 한 어느 유명 학자의 말을 우리는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의 정책 실패로 일부 장기침체론자가 예측하는 것처럼 지금의 저성장세가 앞으로 25~40년간 지속되는 장기침체에도 미리 대비해야 한다. 장기침체하에서 모든 산업과 서비스는 더욱 극심한 세계 속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조선과 해운산업의 구조조정과 정부가 그동안 추진해 온 노동·공공·교육·금융 등 4대 부문 개혁을 더욱 서둘러야 할 뿐만 아니라 제4차 산업화 시대에 걸맞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끊임없이 추진해 나가야 한다.

사공일 본사 고문·전 재무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