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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문제 풀어나갈 협치, 복지부터 머리 맞대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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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26면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이번 선거 결과의 여소야대는 정치의 판도를 크게 바꾸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아마 정치에 대한 우리의 의식도 바꾸어 놓게 될 것이다. 이제 정치가 대결과 투쟁이 아니라 타협, 요즘 쓰이는 말로 협치(協治)가 될 것이라고 한다. 국회에 절대 다수를 확보한 정당이 없으니 이것은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국회 내에서의 새로운 세력 균형 때문만이 아니라 정치가 풀어야 할 문제들이 반드시 대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투표자들의 의식 자체가 오늘의 국가적 문제가 어느 하나의 극단적 대결로 풀어버릴 수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은 것일 것이다.


정치인들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일반 민중의 관점에서도 지금의 시점에서 제일 큰 사회 문제는 복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실업자나 은퇴자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 복지 문제의 핵심이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더 복잡한 조정을 요구할 것이다. 실업자의 경우, 보다 나은 해결은 국가 보조에 의한 사회보장보다는 취업 기회의 확대에 있을 것이고, 이것은 경제 전반의 형편에 따라 쉽기도 어렵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경제가 다시 세계 경제의 움직임에 연계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형세이다. 이러한 착잡한 연계망 속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정도의 성장률이 확보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왜 성장이 있어야 경제가 안정되고 사회가 안정되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리고 세계적인 규모의 경제성장은 결국 중대한 환경 훼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과학기술과 산업화를 전망하면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결국 인간의 삶의 문제는 우주의 다른 별로 이주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우주 진출이라는 앞날을 내다보는 예언이기도 하지만, 지구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리라는 불길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라의 경제, 세계 경제 움직임에 연계경제와 사회 안정의 문제를 이러한 복합적인 연계 관계에 넣어 그것을 환상적인 규모에까지 확대하는 것이 당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아님은 물론이다. 그것은 문제의 해결을 기피하는 하나의 방식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이든지, 여러 관련들이 문제 해결에서 고려해야 할 테두리가 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는 있다. 관련된 이 테두리 전부를 인간이 자신들의 의도대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계관계가 반드시 필연의 사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 사이에는 가능한 방편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찾는 일이다.


사회 복지의 문제는 대체로 진보주의의 사회 계획에서 중요하고 보수적인 입장 또는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으로 말하여진다. 물론 이 후자의 경우도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기보다는, 경제의 복합적 연계 관계로 인하여, 간단한 해결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대로 진보적인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유명한 말 (출전은 다르다는 설이 있지만), “밀려오는 밀물이 있으면 모든 배가 뜨게 된다”는 말은 문제의 해결은 전체 상황이 나아지면 절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입장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복지의 문제 또는 모든 계층의 생활 안정의 문제가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정치의 핵심에 있는, 그리고 긴급하게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치 지향에 관계없이, 기초적인 생활의 안정이 없는 곳에 어떤 정치 체제도 유지될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정권이 보수냐 진보냐 하는 데에 관계없이 사회 복지를 위한 여러 조처는 취해지게 마련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논자에게는 미국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의 원형으로 생각되지만, 그 복지의 수준이 한국보다 낮다고 할 수는 없다. 다른 한편으로, 현 시점에서 전체적으로 큰 시련을 겪고 있는 나라 가운데에는 남미의 베네수엘라나 브라질을 생각할 수 있다. 베네수엘라의 진보주의 대통령 우고 차베스는 혁신적인 정책을 강행하여 놀라운 사회 개혁을 성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이은 마두로 대통령 치하에서의 베네수엘라는 현 시점에서 국민에게 생활용품이나 전기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거대한 시련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도된다. 연속 2대의 진보적 대통령 하에서 사회 개혁을 경험한 브라질의 경우도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이들 나라의 국내적 사정의 전변(轉變)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들 국가의 경제가 얼마나 국제 경제의 변화에 연결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적어도 베네수엘라의 경우 가장 큰 원인은 국제 유가의 폭락이 그 원인이기 때문이다.


공동의 기반 존재 인정해야 협치 가능국민 모두의 기초 생활을 보장하는 것은, 어떤 정치 체제에서나 정권의 안정이라는 관점에서만도 필수 사항이다. 그러나 그것은 체제 유지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금 거론되는 협치는 이러한 사실을 재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해관계의 조정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이해관계를 포함하여 타협이나 협조가 가능해지려면, 일단의 차이 아래에 공동의 기반이 존재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국가의 공동체적 의의를 확인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복지 정책의 불가피성도 여기로부터 새삼스럽게 인정될 것이다. 이 때 그것은 정치가 그 참 의미를 회복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공자의 유명한 말에 ‘정자정야(政者正也)’라는 것이 있다. 정치의 정(政)은 정(正)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정치의 참 의미는 공동체적 정체성을 보장하는 데에 있고 거기에 원리가 되는 것은 정의이다. 여기에서 정의란 단순히 이익의 균등한 분배만이 아니라 그보다는 넓은 관점에서 인간적인 삶의 조건을 실현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정치사상에서 정치 권력 체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말로 ‘천명(天命)’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권력은 하늘에서 내린 명(命)을 받아야 정당성을 얻는다는 것이다. 천명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백성을 편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질적으로 넉넉한 삶을 살 수 있게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것은 세간적인 이해가 요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 세계의 정신적인 이치가 명령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권력을 정당화하고 권력자의 정치 행위를 위한 구실이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정치가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통치술을 논하는 글이 종종 성학(聖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도 정치가 세속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인간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언급된 성스러운 덕은 물론 오늘날의 의미에서의 신성함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피치자(被治者)보다는 통치자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성학이라는 용어는 그러한 통치자가 지배하는 정치 그것도 덕에 기초한 것이어야 한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현실이야 어찌 되었든, 이와 같이 하늘의 이치가 있고, 성스러움 덕이 있는 것이 정치 공간이라 한다면, 거기에 사리사욕, 당리당략, 권력욕과 같은 것들이 난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바른 정치 공간을 오염하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정신성을 강조하는 정치 체제는 대체로 억압적인 체제가 되기 쉽다. 또 정치인이 참으로 성인이어야 한다면, 그러한 성인으로 하여금 정치를 떠맡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철인(哲人)정치를 이상화하고자 했던 플라톤은 참으로 지혜를 쌓은 사람을 정치에 들어오게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오로지 윤리적 인간으로서의 의무감 때문일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다. 정치가 참다운 의미에서 반드시 세속적인 인간 행위의 영역이 아닌 것은 보통 사람의 심정에서도 볼 수 있다. 복지의 차원에서 중요한 것이 평등한 분배라면, 이것은 단순히 배분의 평등을 위하여 주장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거기에는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그에 대한 존중 또는 동정심이나 자비심과 같은 윤리적인 감정이 작용한다.


그리고 정치 자체가 성인은 아니라도 사적 개인을 공적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간단한 차원에서도 정치에 중요한 것은 명예의 추구이다. 벼슬이 명예라고 할 수도 있지만, 명예의 추구는 저절로 인간의 공적 품성을 함양하는 기능을 가질 수 있다. 경쟁하고 합의하고 동맹을 결의(結義)하고 하는 과정에서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탁월성을 연마할 수 있다. 최종적으로 공적 봉사가 그 표현이 된다. 사람들은 스포츠에 관심을 갖듯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다. 정치인에게도 그것은 비슷한 관심을 자극하는 인간 행동의 영역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탁월한 인격적 능력을 보이는 일이다. 미국의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정치를 ‘공적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 일이 있다. 그 행복은 여러 사람이 함께 행동하며 그 행동이 볼만한 것이 되게 하는 데에서 온다고 한다. 그러한 행동에 참여하는 사이에 개인은 자신의 인격적 가능성의 보다 완전한 실현을 보게 된다. 아렌트의 이런 생각은 정치 행위에 높은 정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지는 아니하면서도, 그것을 사사로운 이해 타산과 당파적 정략의 영역으로부터 빼내어 보다 높은 인간 존재의 가능성 속에 위치하게 한다. (최근에 내가 접한 여러 정치 담론에서 아렌트에 관한 관심이 높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데올로기적 정치 해석이 쇠퇴함에 따라, 정치영역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그의 생각이 더욱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정치를 그 나름으로 이해타산의 관계로부터 한층 높은 자리로 끌어 올리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정책 대결은 인격적 지혜·고려의 과정이번 선거에서 여야 양당의 대결 체제가 다당 체제로 옮겨 가게 된 것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나누어지는 진보·보수의 현실적 의미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할 수 있다. 대결과 차이가 없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름의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사회문제를 명증화하는 데에 중요한 계기가 된다. 동시에 공공의 기초를 확인하는 준비 단계가 된다. 정치에서 바른 의미에서의 대결이란 정책의 대결이다. 정책의 대결은 공통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진다. 또 이러한 명증화의 과정은 인격적 지혜와 고려의 과정이다. 설득력을 갖는 정책은 독단을 넘어갈 수 있는 인간적 지혜에 의하여 작성된다. 이 지혜는 사실을 직시하고, 사실 선택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면서, 그 가운데 결단의 책임을 받아들이는 지혜이다. 그러하여 그것은 인간적 신념을 숨겨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황에 적응하는 유연성을 갖는다. 이러한 정책 대결, 그리고 그것을 통한 정책의 명증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인격체-정치 공간은 이러한 요인들이 구성하는 인간의 창조물이다. 그러한 정치 공간에 들어가면서 헌신하는 정치인이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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