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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찾은 국가 중흥의 길, 지식 인재 양성이 국가 중흥의 요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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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9호 1 면

【총평】


?세종은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자들과 많은 토론을 거쳐 정책을 시행했다. 이 시기에 신숙주, 정인지, 서거정, 성삼문 등 뛰어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세종은 오랜 기간 집현전 학자들과 언어와 문자를 연구한 끝에 훈민정음(한글)을 만들어 반포했다(1446). 세종은 새로 만든 문자를 ‘백성을 가르치는(훈민 訓民) 바른 소리(정음 正音)’라고 하여 훈민정음이라 했다.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본 정치의 이상 실현을 향한 노력에 대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훈민정음 언해본, 서강대학교 소장] (출처: 미래엔 한국사)

? 한글은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뜨고 동양 철학의 원리를 응용하여 만든 매우 독창적인 문자이다.이제 누구나 한자가 아닌 한글로 우리 말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훈민정음 창제에는 문자 생활의 편리 뿐 아니라 백성들을 유교적 윤리로 교화하여 통치의 안정성을 높이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나아가 한자 음운을 표준화하고 백성에게 문자를 익히게 하여 교화를 쉽게 하려는 것도 중요한 목적이었다.


?조선은 새로 만든 한글 보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종은 한글로 쓴 책을 출판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정부에서는 조선의 창업을 칭송하는 “용비어천가”를 훈민정음으로 편찬하여 보급했다. 부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도 훈민정음으로 편찬하여 보급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 비상교육 한국사)

? 지방의 행정 실무를 맡은 서리들에게 한글을 익히게 하여 백성들과 쉽게 소통할 수 있도록 했다. 양반 관료는 한글 창제에 반대했지만, 부녀자와 농민 사이에서는 말과 글이 일치하는 한글이 점차 확산되었다. 한글 창제로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어 우리 문화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을 마치기 전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가 있다. …… 심지어 바람 소리와 학의 울음소리, 닭 울음소리, 개 짓는 소리라도 모두 글로 쓸 수가 있다.”

-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서문 (출처 : 천재교육 한국사)


?성리학은 조선 건국의 사상적 바탕이자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였다. 세종은 태종이 다진 안정된 왕권을 바탕으로 모범적인 유교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정책 연구 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하여 인재를 육성하고, 유교적인 제도와 의례에 대한 편찬 사업을 실시했다.


? 세종 때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삼강행실도”가 편찬되었다. “경국대전”에서는 유교에서 중요시하는 삼강오륜을 어긴 것을 강상죄라 하여 반역죄와 마찬가지로 중대 범죄로 취급했다. 그 까닭은 패륜을 법으로 엄중히 다루어 유교 윤리를 권장하고, 나아가 유교적 도덕으로써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도덕 사회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삼강행실도”를 펴내며 다른 책과 달리 한글을 사용하고, 그림을 그려서 배포한 것에도 이런 의도가 담겨 있다.


? 성종 때에는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여 국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비했다. 국조오례의는 제사 의식인 길례(국가에서 행하는 제사), 관례와 혼례 등의 가례, 사신 접대 의례인 빈례, 군사 의식에 해당하는 군례, 상례 의식인 흉례(장례)를 정리한 책이다. 이러한 윤리서와 의례서가 보급되면서 유교 윤리가 백성의 일상생활 속에 자리 잡아 갔다.


? 16세기에는 “소학”과 “주자가례”의 보급에 힘쓰던 사림이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이륜행실도”와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동몽수지”를 보급했다.

[갑인자로 찍은 "월인천강지곡", 서울서원 소장]["동국정운" 서문, 간송미술관 소장]갑인자는 글자의 크기가 고르고 네모 반듯했다. 조판도 완전한 조립식으로 고안하여 인쇄할 때 흔들림을 줄였다. 그 결과 인쇄 속도가 두 배로 빨라져 하루에 40여 장을 찍을 수 있었다.(출처: 두산동아 한국사)

? 조선 초기 지배층들은 고려 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이루어낸 자부심을 바탕으로 역사서를 편찬하여 왕조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특히 한 왕조의 역사를 후대에 남기고자 실록을 중요하게 여겨 “조선왕조실록”을 지속적으로 편찬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후 조선 말까지 국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편찬되었다. 이는 오늘날 세계 기록 유산으로 인정받고 있다.


? 왕위가 바뀌면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전왕의 통치 기록인 사초, 시정기, 승정원일기 등을 모두 합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은 4부를 만들어 춘추관과 전주, 성주, 충주 사고에 보관했다.


? 실록은 내용이 방대할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어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 태조때 정도전은 조선 건국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국사”를 편찬했다. 이후 기전체의 “고려사”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성종 때 서거정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서를 편년체로 정리한 “동국통감”을 편찬했다. “동국통감”은 단군 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엮은 최초의 통사로, 세조 때 편찬하여 성종 때 완성되었다.


? 조선 초기에는 역사 편찬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는데, 기전체와 편년체의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군권파는 국왕의 활동을 중심으로 연대순으로 서술하는 편년체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고, 신권파는 신하들의 열전이 있는 기전체로 서술할 것을 주장했다. “동국통감”은 왕권 강화를 추구하던 세조 때 편찬을 시작했기 때문에 편년체로 되어 있으나 성종 때 완성될 무렵 사림들의 사론이 추가되어 결국 타협을 보게 되었다.


? 16세기에는 왕도 정치를 추구하는 사림의 역사의식을 반영하여 박상이 “동국사략”을 편찬했으며, 이이가 “기자실기”를 편찬했다. 박상은 “동국사략”에서 개국공신을 비판하고 역성혁명에 반대한 사대부를 칭송했다. 이이는 “기자실기”에 단군보다 기자를 중시하는 역사인식을 반영했다. 사림은 단군보다는 기자를 높이 평가했다.


? 조선 초기에는 중앙 집권이 강화되면서 각종 지도와 지리지를 제작하여 통치 자료로 활용했다. 태종 때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고, 세종 때에는 전국 지도인 팔도도를 만들었다. 세조 때 완성한 동국지도는 인지의 등 과학 기구를 이용하여 만든 최초의 실측지도이다. 16세기에 만든 지도 가운데 조선방역지도가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지리지 편찬도 추진되어 세종 때는 “신찬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다. 성종때는 “팔도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를 참고하여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다. 중종 때 “동국여지승람”을 보충하여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핵심 키워드】


☞ 세종은 정책 연구 기관으로 [집현전]을 설치했다.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언어와 문자를 연구한 끝에 [훈민정음(한글)]을 만들어 반포했다(1446). 세종은 한글로 쓴 책을 출판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조선의 창업을 칭송하는 [용비어천가]와 부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등을 훈민정음으로 편찬하여 보급했다.


? 세종 때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삼강행실도]를 편찬했다.


? 성종 때에는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여 국가의 여러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비했다. 16세기에는 연장자와 연소자, 친구 사이에서 지켜야 할 윤리를 강조한 [이륜행실도]와 어린이가 지켜야 할 예절을 기록한 [동몽수지]를 보급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이후 조선 말까지 국가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편찬되었다.


? 태조때 정도전은 조선 건국과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국사]를 편찬했다. 이후 기전체의 [고려사]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성종 때 서거정은 고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서를 편년체로 정리한 [동국통감]을 편찬했다. 16세기에는 박상이 [동국사략]을 이이가 [기자실기]를 편찬했다.


? 세종 때에는 전국 지도인 [팔도도]를 만들었다. 지리지 편찬도 추진되어 세종 때는 [신찬팔도지리지] 가 편찬되었다. ☜


【예상 문제와 해설】


?1. (가) 국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조선은 개국 후에도 여전히 고려 때 사용하였던 중국의 역법을 썼으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가)이/가 즉위한 후 정인지, 정초 등에게 명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도록 하고, 수시력과 회회력을 자세히 살펴 우리의 실정에 맞게 바로 잡아 “칠정산 내편”과 “칠정산 외편”을 만들게 하였다.
①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②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③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하였다.


④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겼다.


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⑤

* 2013년 3월 학력평가 5번

* 41회 “절반의 성공 - 성종②” 편 문제 2

해설 : 정답 ①

<오답 풀이>

② 경국대전은 세조 때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성종 때 완성했다.

③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은 고려 시대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되었다.

④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은 태조 이성계 때의 일이다.

⑤ 현존하는 동양 최고(最古)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태종 때 만들어졌다.


2. (가)~(다)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경국대전]

(가) 시정을 논의하여 바르게 이끌고, 모든 관원을 살피며, 풍속을 바로잡고,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발기며, 건방지고 거짓된 행위를 금하는 일 등을 맡는다.

[經國大典]

(나) 왕에게 간언하고, 정사의 잘못을 논박하는 직무를 관장한다.

(다) 궁궐 안에 있는 경적(經籍)을 관리하고, 문서를 처리하며, 왕의 자문에 대비한다.


① ?(가) - 왕명을 받아 국가의 큰 죄인을 다스렸다.


② ?(나) - 세종 때 정책 연구 기관으로 설치되었다.


③ ?(다) - 국정을 총괄하고 정책을 심의, 결정하였다.


④ ?(가), (나) - 군사 기밀과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⑤ ?(가), (나), (다) - 권력의 독점을 막는 언론 기능을 하였다.

* 2014년 10월 학력평가 4번

* 41회 “절반의 성공 - 성종①” 편 문제 5

해설 : 정답 ⑤

(가)는 사헌부이며, (나)는 사간원, (다)는 홍문관이다.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 3사는 권력의 독점을 막기 위한 언론 기능을 담당하였다.

<오답 풀이>

② 세종 때 정책 연구 기관으로 설치된 것은 집현전이다.


3. (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역사 Q & A

?

Q 궁금 합니다

(가)의 일대기를 정리해 주세요.

?

A 답변입니다

19세 성균시에 합격

48세 조준, 정몽주 등과 공양왕 추대

51세 개국 일등 공신 책봉

53세 『심기리편』저술, 한양 천도 주도

54세 『고려국사』편찬

57세 1차 왕자의 난으로 사망


① 노장 사상과 양명학을 포용하려 하였다.


② 경연을 강화하고 위훈을 삭제하 것을 주장하였다.


③ 주례의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한 법전을 편찬하였다.


④ 고조선에서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⑤ 화약 무기의 제작과 사용법을 정리한 병서를 편찬하였다.

* 2011학년도 6월 모의 평가 13번

* 19회 “악역을 자청한 임금 ① ? 태종” 편 문제 5

* 43회 “성공한 국왕들 - 세종 ①” 편 문제 6

해설 : 정답 ③

③ 정도전은 유가의 이상 제도인 “주례”를 바탕으로 6전 체제의 “조선경국전”을 편찬했다.


4. (가) 국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조선은 개국 후에도 여전히 고려 때 사용하였던 중국의 역법을 썼으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다. (가)이/가 즉위한 후 정인지, 정초 등에게 명하여 한양을 기준으로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도록 하고, 수시력과 회회력을 자세히 살펴 우리의 실정에 맞게 바로 잡아 "칠정산 내편"과 "칠정산 외편"을 만들게 하였다.
①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②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③ ?직지심체요절을 간행하였다.


④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돌에 새겼다.


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 2013년 3월 학력평가 5번

* 43회 “성공한 국왕들 - 세종 ①” 편 문제 9

해설 : 정답 ①

지문의 내용을 통해 세종의 업적을 묻는 질문임을 알 수 있다.

① 세종은 한글(훈민정음)을 만들어서 민족 문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5.?(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호조 판서 서거정이 (가)을/를 바치면서, “우리나라에 교지나 옛 법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서로 모순되고 앞뒤가 맞지 않아 나라의 기본이 되는 법이 하나로 정해지지 못한 실정이었습니다. 선왕대로부터 이들을 모두 한 곳으로 모아 만대에 이어질 법을 만들기 시작하여 마침내 6전 체제로 완성하였으니, 이로써 왕조의 근본을 새롭게 세우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보기]

ㄱ. 오례의 예법과 의식 절차를 체계화하였다.

ㄴ. 유교적 통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편찬하였다.

ㄷ. 백성 교화를 위해 충신과 열녀의 사례를 정리하였다.

ㄹ. 세조 때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성종 때에 마무리하였다.


① ㄱ, ㄴ ? ?② ㄱ, ㄷ ? ??③ ㄴ, ㄷ ? ?④ ㄴ, ㄹ ? ?⑤ ㄷ, ㄹ

* 2014학년도 수능예비시행 11번

* 20회 "악역을 자청한 임금 ② ? 세조" 편 문제 1번

* 42회 " 절반의 성공 - 성종③" 편 문제 6번


?

해설 : 정답 ④

(가) 내용은 경국대전에 대한 것이다.

④ ㄴ. 경국대전은 조선의 통치 제도를 성문화한 것으로, 법전에 근거한 합리적인 국가 운영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ㄹ.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하여 호전과 형전이 완성되고 예종 때 6전이 모두 완성되었으나 반포하고 시행한 왕은 성종이다.

<오답 풀이>

ㄱ. 오례의 예법과 의식 절차를 체계화하여 기록한 책은 세종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때 완성한 국조오례의이다. 이 책의 편찬으로 조선시대 의례와 관련된 기본 규칙이 정해졌다.

ㄷ. 백성 교화를 위해 충신과 열녀의 사례를 정리한 책은 세종 때 편찬된 삼강행실도이다. 일반 백성들에게 군신, 부자, 부부의 윤리를 보급시킬 목적으로 만들었다.


6. 그림의 수령에게 대답하였을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양반: 근래 향약을 시행하고 있으나 백성들이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해 답답합니다.


② ?향리: 귀향형을 받아 속현에 온 고위 관리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힘이 듭니다.


③ ?농민: 농사일이 바쁜 철에 교대하여 군대 복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걱정이 큽니다.


④ ?상인: 요즘 상평통보가 많이 주조되었다는데 실제로는 유통이 부진하여 장사에 별 도움이 안됩니다.


⑤ ?노비: 어미가 양민이면 자식을 양민으로 삼는 법이 시행되었는데도 주인은 계속 제 자식을 노비로 부리려 합니다.

* 2013학년도 수능 7번

해설 : 정답 ③

집현전은 세종 대 그 규모가 커졌다가 세조 때 단종 복위 사건을 계기로 폐지되었다. 따라서 세종에서 세조 집권 초에 해당되는 내용이 정답이 될 수 있다.

③ 조선 전기 16세 이상의 정남에게는 군역의 의무가 있었다. 군역에는 군사 복무하는 정인과 정군이 복무 시 드는 비용을 보조하는 보인이 있었다.


7. 다음 대화가 있었던 왕 대의 사실로 옳은 것은?


①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정벌하게 하였다.


②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집현전을 없앴다.


③ ?정도전으로 하여금 민본적 통치 규범을 마련하게 하였다.


④ ?문하부 낭사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켜 대신들을 견제하였다.


⑤ ?국가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다.

* 2013학년도 9월 모의평가 11번

해설 : 정답 ①

제시문에서 삼강행실도가 나온 것으로 보아 세종 대의 일을 고르면 된다.

① 왜구의 약탈로 피해가 커지자, 세종 때 이종무로 하여금 쓰시마 섬을 토벌하게 하였고, 일본과의 교역을 중단했다. 이후 일본이 다시 교역해줄 것을 요청하자 조선은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을 개항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했다(계해약조, 1443).

<오답 풀이>

② 강력한 왕권 행사를 위해 집현전을 없앤 왕은 세조이다.

⑤ 국가 행사에 필요한 의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를 편찬한 이는 성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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