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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할리우드 간 무기개발인력이 만든 시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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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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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이사

199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는 몰락하고 있었다. 90년 5% 초반 대이던 실업률이 불과 3년 만에 두 배가 넘는 10.7%까지 치솟아 버렸다. 한 번 올라간 실업률은 1996년까지 9%대에서 오르락내리락했다.

1993년 미 방산업체 인력감축 바람
무기개발자가 디지털영화 재취업
영화 풍성해지고 실업률도 떨어져
‘고용시장 유연성’의 힘 보여줘

90년대초 동서냉전이 종식되자 부시정부가 입안하고 클린턴정부가 실행한 군비 삭감은 캘리포니아의 최대도시인 LA에 대규모 실업을 야기했다. 영화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 LA를 먹여 살린 산업은 사실 방위산업이었다. LA엔 다수의 방위산업 기업 본사가 있었고 도시 외곽에는 각종 군사 장비를 개발하는 연구소와 생산 공장들이 있었다.

하지만 LA의 실업률은 96년부터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엔 4%까지 내려 왔다. 군비 삭감에 따른 경기 침체를 함께 겪었던 다른 도시들이 완만하게 경기를 회복해 나가고 있었지만 LA의 회복은 더 급격했다. 대규모 실업과 경기 침체를 우려한 미국 정부가 실시한 ‘방위산업의 민수전환 프로그램’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것보다 더 큰 기여를 한 것은 ‘디지털 할리우드’였다.

인터넷 성장과 더불어 콘텐트의 디지털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던 할리우드에 방산 분야의 숙련된 개발자들, 특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의 유입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방산 기업에서 연구·개발에 종사하던 기술자들이 애니메이션 및 게임 디지털화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할리우드가 만들어내는 콘텐트의 디지털화가 촉진된 것이다.

선진국에는 실업자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독일의 ‘고용전환기업’이나 스웨덴의 ‘직업안정보장위원회’ 등은 실업자들의 재취업을 위한 교육이나 일시적 사회보장 등을 제공한다. 93년 클린턴 행정부가 제안한 ‘기술재투자계획 (Technology Reinvestment Program·TRP)’도 형식은 다르지만 방위산업 종사자들에게 업종 전환의 기회를 제공했다. 그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자금으로 4년간 총 200억 달러가 배정됐다.

선진국들의 재취업 프로그램도, 실업 해결을 위해 투입하는 정부 예산의 풍부함도 샘이 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부러운 것은 산업화의 긴 과정을 거쳐 오며 축적한 업종전환의 유연성이다. 군사무기 개발자가 엔터테인먼트 기술 개발자가 돼 할리우드에 또 다른 혁신의 공기를 불어 넣어 주는 그런 유연함 말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두세 차례의 경제 위기를 극복했지만 실업률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 위기 국면들은 역설적으로 고용시장 혹은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개선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간 우리는 눈 앞의 문제 해결에만 급급했다. 최근 들어 거제·울산·구미 등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우리의 마음을 더욱 더 조급하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위침 (磨斧爲針)의 정신으로 멀리 내다보는 대책을 세우고 실천을 해 나가야 한다.

우선, 할리우드로 간 방산 기술자들처럼 한국의 고용시장도 유연성을 가지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어떤 산업이 언제 어떤 규모로 성장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예측은 이제 불가능하다. 조선소에 근무하던 기술자가 다른 산업에 재진입할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배제된 채, 프랜차이즈 식당의 주인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언제까지 방치해 둘 것인가.

30세 사장을 보좌할 50세 개발자도 필요하다. 경험이 풍부한 경영진이나 전문가들이 기업을 물려받은 젊은 2·3세들을 보좌하는 재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스타트 업에서도 이런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떤 가치를 만드느냐에 따른 지위와 보상의 크기를 수용할 수 있는 성숙한 사회로 진화해야 한다. 그래야 전문성과 경험이 풍부한 숙련된 기술자가 젊고 패기 넘치는 어린 사장과 함께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경직된 산업 간 경계를 허물고 직위를 바라보는 봉건적인 시선을 고치려면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 왔던 모든 것들을 다 버리고 새로운 차원의 도전을 해야 한다. 개인의 굳은 결심 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한국경제가 직면한 문제는 그 어떤 국가도 겪어 보지 못한 우리들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웃거리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별로 없어 보이기에 더 불안하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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