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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진주 소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진주소씨의 족보는 시조를 후진한주 소백손공으로 전한다. 그의 5대손이 신라6부 촌장 중 한사람인 돌산고허촌장 소벌공. 그는 양산에서 박혁거세가 태어난 알을 찾아낸 신라건국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경주에 터를 잡은 소씨일가가 진주로 본관을 정한 것은 중시조 소경공의 「구태현몽」에 기인된다.
신나 진덕왕때 상대등을 지낸 경공은 8순이 되도록 손자를 보지 못하고 한탄했다.
어느날 밤 잠자리에 든 경공의 꿈속에 소벌공이 나타났다. 『그대가 도사곡(현재진주시상대동)으로 이주하면 구태자(9장군)를 얻으리라』고 했다. 이 꿈은 이상하게도 부인 박씨와 며느리 석씨에게도 동시에 나타났다.
경공은 84세때인 660년 3월3일 도사곡으로 이주한다. 아니나 다를까 며느리 석씨가 손자복서를 낳았다.
3세 복서(총관)와 4세 억자(총관), 5세 후준(총광), 6세 검백(도독), 7세 상영(도독), 8세 목(도독), 9세 은(도독), 10세 송(도독), 11세 격달(대장군)의 9세9장군이 배출돼 소벌공의 현몽이 그대로 들어맞았다는 얘기다.
특히 당나라에 유학, 웅주도독을 지낸 소은은 아버지 소목, 아들 소문(송의 동생)과 함께 3대 문장으로 삼소의 칭송을 들었다.
격달은 신나 신덕왕때 고소산성을 쌓은 공으로 하동태수가 되었고 후삼국의 풍운을 맞아 강주(진주)의 향방이 문제가 됐을때 1천군을 거느리고 고려에 들어가 대장군이 되었다. 고려 건국의 공으로 뒷날 삼한벽상공신에까지 올랐다. 는 고려정종 2년 진주소씨 최초의 대동보인 동근보(서기947연)를 발행했다고 한다. 현재는 서문만 남아있는 이 동근보는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전해지고 있다.
진주소씨의 가운은 격달공의 5세손 진주부원군 소계금의 딸이 헌종비 회순왕후로 간택되면서 융성을 맞는다.
고려조에서 소씨는 문하시중 광보 등 정승 10명과 대제학 소율 등 당상관 27명 등 문과 8명, 신생과 7명, 무과 4명을 배출했다.
추밀원사를 지내다 무신정치로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낙향한 소경손, 몽고침입때 좌우위상장군으로 2천 병력을 이끌고 1만대군의 아무간과 맞서 싸우다 순사한 소함,공민왕의 난정을 당하고 낙향한 청백리 소을경, 정몽주의 문인으로 선죽교의 변이 있은 후 낙향한 소조 등은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천의 아들 희가 무과에 급제, 부위로 중군사정을 지내면서 가문의 관운을 연다. 희의 손자로 구례현감을 지낸 소자파는 그의 일곱아들 모두가 벼슬에 올라 위세를 떨쳤다.
2남 소세량은 중종조 문과에 급제, 삼사의 벼슬을 두루 지내고 대사간에 올랐으나 부모의 공양을 위해 남원부사로 내려가 효를 다했다.
5남 양곡 소세양은 조선조 진주소씨의 대표적인 인물.
중종 4년 식년문과에 금제, 여러 관직을 거쳐 수찬이 되고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복위를 건의하여 현능에 이장케했다.
그는 이조정랑·직제학 등을 거쳐 사성이 되어 영접사 이행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아 시문으로 화답, 그들을 놀라게 했다. 그후 승지·왕자사부·전라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형조판서 등을 지냈고 지중추부사가 되어 진하사로 명나라에 가서는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어 양관대제학을 겸임했으나 인종이 즉위 을사사화로 대윤일파의 탄핵을 받자 벼슬에 뜻을 버리고 전나도익산에 은거, 조용한 만년을 보냈다. 양곡은 문명뿐 아니라 서예에도 뛰어나 송설체로도 일가를 이뤘다.
후일 이쇄광은 『지봉류세』에서 『공은 비록 일부 사논의 배척을 받았으나 일찌기 은퇴하여 한가한 복을 누린지 20년이 되었으니, 근세에 글 잘하는 사람치고 고종명하고 부귀를 누린 이가 그보다 나은 이가 없었다』고 양곡을 추모했다. 문집으로 양곡집이 전해진다.
희의 후손에서는 양곡 외에도 많은 학자와 문신이 나왔다.
부제학 소봉의 손자로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일념한 사은 소영복, 첨사 소세공의 증손으로 문과에 급제,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소동도, 송시열의 문인으로 직언상소를 잘해 권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외직에 머물러야했던 월주 소두산, 이조의 학문을 빛낸 춘암 소응천·담악헌 소수거·인산 소휘면 등은 학문에서 일가의 전통을 이은 이름들이다.
소씨는 임진왜란때 많은 구국의 절신을 냈다. 소제는 형 황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권율장군의 휘하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진주싸움에서 용전끝에 전사했고 소상진은 김성일과 함께 의병을 모아 호남에서 별장으로 홍의를 입고 선전, 성주싸움에서 수백명으로 수천의 적과 맞서다 전사했다. 양곡의 증손 소항진도 의병4백명으로 이화현싸움에서 용전하다 전사했다.
소씨일가의 구국충정은 구한말에도 빛을 더해 소휘태·소휘옥·소휘선·소진형·소병원·소진욱 등이 독립유공자로 기록돼 있다.
의병을 일으켜 일본과 싸운 소승규·소병헌·소용무·소간술·소휘간과 독립을 위해 가산을 다 바치고 옥고를 치르기도 한 소성규·소진형·소철영 3대의 애국충절, 반공의사 소운영·소병상 등이 이름을 남겼다.
현대의 소씨 인물로는 군정시절사법부차장을 지낸 소완규, 2·3·5·6대 국회의원으로 초대참의원 부의장을 지낸 소선규형제가 돋보인다.
소완규의 장남 소진탁박사는 연세대전의 대학장으로 현재 전국종친회장을 맡고 있으며 소관규의 2남 소진철박사(정치학)는 외무부본부대사로 있다.
예비역 육군대장 소준열씨, 소중영·소종팔변호사, 소병해 삼성그룹비서실장, 소흥렬 이대교수 등이 각계서 활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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