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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카메라 다른 결과물 예술 꽃피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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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8호 8 면

이승택의 ‘대지 미술’ 작업을 사진으로 찍은 ‘이끼 심는 예술가’(1975), 이끼·씨앗·색소·오브제

“사진이라는 거, 그까짓 거 뭐 그냥 셔터 대충 누르면 나오는 거 아냐~.”


‘사진도 예술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 대부분 사람들의 속내는 아마 이런 것이 아닐까.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해야하는 번거로움까지 사라진 디지털 시대, 휴대전화로 언제 어디서나 이미지를 만들고 소비하는 이 시대에, 사진이 어떻게 그 거창한 ‘예술’이 되느냐 말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선보인 ‘아주 공적인 아주 사적인: 1989년 이후 한국현대미술과 사진’(5월 4일~7월 24일)은 이런 질문과 의문에 대한 대답이다. 사진작가 75명의 작품 300여 점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사진이 어떻게 예술이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같은 붓이라도 한석봉이 잡느냐 시골 이방이 잡느냐에 따라 다른 글씨가 나오는 것처럼, 같은 카메라라도 누가 무엇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전시는 국내에서 새로운 사진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고 해외에서 공부한 유학파들의 귀국이 시작된 1989년을 기점으로 잡았다. 한국 예술사진의 맥락을 ‘실험의 시작’ ‘개념적 미술과 개념사진’ ‘현대미술과 퍼포먼스, 그리고 사진’ ‘이미지 너머의 풍경: 상징, 반미학, 비평적 지평’의 4가지 챕터로 나눠 작가 53명의 작품 200여 점을 선보였다. 특별전 ‘패션을 넘어서’에서는 1990년대 이후의 패션사진가 22명의 작품 80여 점을 볼 수 있다.


카메라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사물을 어떻게 다르게 볼 것인지, 이미지를 어떻게 색다르게 구현해낼 것인지에 대한 치열한 고민들로 전시장은 이미 후끈거렸다.

김수강의 ‘보자기 01’(2004), 검 바이크로맷 프린트. 그려낸 듯한 질감이다.

이규철의 ‘무제’(1988), 혼합 매체. 반구형 입체 작업이 눈에 띈다.

배찬효의 ‘의상 속 존재 1’(2006), C 프린트. 트렁크갤러리 소장

다르게, 더 다르게 보이도록 ‘챕터 1’관의 부제는 ‘실험의 시작’이다. 주명덕의 ‘잃어버린 풍경’ 시리즈 앞에 선 이지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운영부장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 군락을 이루는 나무들의 디테일을 살펴보세요. ‘회화적 모노크롬’으로 불리는 그의 작품세계가 얼마나 픽처레스크(picturesque·그림 같은)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그는 2010년 런던에서 윌리엄 왕자가 기획한 사진전 ‘포지티브 뷰(Positive View)’에 한중일 사진 커미셔너로 참가했고 2011년에는 웨일즈 국립사진미술관에서 한국 현대사진전 ‘빌리빙 이즈 시인(Believing is Seeing)’을 기획했다. 2013년 핫셀블라드 국제사진상의 첫 한국인 심사위원도 맡았다. 현대미술과 조우한 사진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 그의 기획의도다.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작가들의 노력은 도드라졌다. 구본창의 ‘태초에 10-1’(1995~1996)이 대표적이다. 핏줄이 툭툭 불거진 손과 발 사진을 한 장이 아닌 여러 장의 인화지로 커다랗게 출력하고 이를 희고 검은 실밥이 다 드러나도록 꿰매 이어붙였다. 원초적인 날 것에 대한 거친 질감이 잘 드러난다.


이들은 다리미나 보따리 같은 일상적 소재를 한지로 출력하거나(이정진) 손작업이 많이 필요한 검 바이크로맷(Gum Bichromate) 프린트로 뽑아내(김수강) 색다른 질감을 선사하는가 하면, 필름에 스크래치를 내 판화의 느낌을 주거나 기름을 발라 유화의 느낌을 주고(김대수) 폴라로이드로 출력한 사진 위에 스크래치를 내 자신의 예술 감각을 표현(송영숙)하기도 했다.


가장 눈에 띈 작품은 경복궁 근정전을 촬영해 반구 형태의 입체 사진으로 구현한 이규철의 ‘무제’(1988)다. 조소를 공부한 작가는 구(球)형 사진을 통해 인간의 감각을 드러내려고 했다. 이를 위해 특수한 삼각대를 만들고 360도 촬영을 했다.


흔한 풍경 사진을 업그레이드 한 작가가 배병우다. 그가 낚아챈 새벽녘 소나무 숲이나 제주 오름의 모습은 얼핏 시커멓지만 자세히 볼수록 디테일을 발견하는 놀라움을 준다. 발견의 기쁨은 민병헌의 사진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얀 하늘과 하얀 땅, 그리고 눈을 뒤집어쓴 나무를 표현한 ‘눈 시리즈’(2011)를 보노라면 영혼마저 순백으로 정화되는 느낌이다. 황규태의 ‘한강’ 시리즈(1993~1995)는 카메라가 디지털과 결합해 어떻게 변신하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결과물이다.


보는 방향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렌티큘러를 주로 사용하는 배준성은 이번에는 초기의 비닐 작업을 내놨다. 유명한 그림에 누드 사진을 결합한 기원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알 수 있다. 필름으로 투명 설치물을 만드는 사진조각가 고명근도 새 작품 ‘건물-5’(2016)을 내놨다.

노순택의 ‘붉은 틀, #1-12’(2005~2007),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방병상의 ‘무제 1-플라워 시리즈’(2000), C 프린트

보이는 것 대신 생각을 담다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의 맥락에서 사진을 처음 활용한 작가가 성능경입니다. 스트레이트 포토에 손을 대 자신의 감성을 담아냈지요. 모든 단체사진에서 자신의 눈만 까맣게 가린 ‘S씨의 반평생’(1977)이 대표적입니다. 아방가르드 1세대로 불리는 이승택 작가가 대지 예술을 펼치는 모습을 출력한 세 점의 사진도 처음 소개되는 것이죠.”


2관에는 작가의 생각을 담아낸 작품을 주로 모아 놓았다. 코카콜라 병목에 솜을 꽂아 넣어 화염병을 연상시키는 박불똥의 포토몽타쥬 ‘코火카炎콜甁라’(1988), 이제는 거의 사라진 소통의 공간으로서의 기능에 주목한 양혜규의 ‘평상의 사회적 조건’(2001), 촌부의 꽃무늬 몸빼바지에 카메라를 들이댄 방병상의 ‘플라워’(2001) 시리즈 등이다.


북한의 매스게임을 기하학적 느낌으로 표현한 ‘붉은 틀’ 시리즈와 국립현대미술관 공사 현장에서 수거한 콘크리트 덩어리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춘 ‘내장’ 시리즈는 작가 노순택의 독특한 관점을 잘 보여준다.


박물관 전시실의 투명 상자 속에 벌거벗은 사람을 집어넣고 삶과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김아타의 ‘뮤지엄’ 시리즈, 한 호텔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을 정교하게 합성한 김인숙의 ‘토요일 밤’(2007)은 여전히 강렬한 충격을 준다.


오인환의 ‘우정의 물건’(2000~2008)은 미국 유학시절 서로 다른 친구들의 집에서 발견한 같은 물건을 사진과 설치 작품으로 표현했다. 1999년부터 지금까지 주변에서 본 숫자들을 1부터 1000까지 정리한 ‘숫자 따라가기’ 역시 남다른 관점을 표현하려는 노력의 결과다. 가녀린 네온사인에 주목한 정동석의 ‘밤의 꿈’도 같은 맥락이다.


평범해 보이는 피사체의 반란 사진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가 사람에 대한 것 아닐까. 누군가의 모습, 그 순간의 찰라를 고스란히 남기고 싶다는 염원이 담긴.


하지만 작가들은 그 목적성을 훌쩍 뛰어넘는다. 작가가 주목하는 대상은 그 자체로 함의를 품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오형근의 초상 사진들은 시대적·사회적 현상을 담아내고 있는데 화장을 옅게 한 열여덟 여고생들의 표정과 자태가 묘한 ‘코스메틱 걸즈(Cosmetic girls)’가 대표적이다. 변순철의 ‘전국노래자랑’ 시리즈는 어떤가. 1980년 이래 40년 가까이 방송되고 있는 장수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다양한 스타일의 사람들은 우리와 우리 이웃의 숨겨진 민낯 아니던가.


그런가 하면 강용석의 ‘동두천 기념사진’(1984)이나 김옥선의 ‘해피 투게더’(2002)는 한국 여성과 외국 남성의 삶을 각각 다른 시선으로 풀어냈다.


이갑철은 직접적인 초상 사진보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향해 한껏 날카롭게 각을 세운다. 그의 ‘충돌과 반동’ 시리즈는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는데, 삶과 죽음과 관련된 제의, 샤머니즘, 한(恨), 신명 같은 것들이다.


작가가 직접 영국 역사 속 인물로 분장한 배찬효의 ‘영국 귀부인 되어보기’ 시리즈는 작가가 영국 유학시절 절감했던 문화적 한계와 이방인으로서의 이질감을 담아냈다. 선진아 도슨트는 ‘미녀와 야수’(2007)에 대해 “다른 작품에서와 달리 이 작품에서 작가의 손은 남성성이 두드러지고 게다가 군번줄까지 쥐고 있다”며 흥미로워 했다.


이번 전시에서 사람들의 웃음을 가장 많이 이끌어낸 작품은 아마 조습의 ‘밥’(2015)일 듯하다. 패잔병 부대의 식사시간을 그린 듯한 9장의 연출된 사진은 등장 인물들의 코믹한 표정으로 재미를 더한다.

정연두는 어린이의 그림(아래)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 시리즈를 선보였다. 제목은 ‘낮잠’(2004), C 프린트

초현실적 세상을 꿈꾸며 4관으로 접어들면 왠지 분위기가 색다르다. 초입에 있는 한성필의 ‘메타모르포시스(Metamorphosis)’(2008)는 컴퓨터 그래픽이 아니라 실제로 있는 건물 가림막을 찍은 사진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강홍구의 ‘생선이 있는 풍경’ 시리즈가 관람객을 맞는다. 지하철과 골목길에 거대한 갈치가 천연덕스럽게 누워있다. 이것은 디지털 합성이다. 관람객은 헷갈리기 시작한다. 실제는 무엇이고 가상은 무엇인가. 실제와 실제가 섞여 있는데 왜 가상인가.


동작을 한번쯤 따라해 보게 되는 정희승의 ‘무제’(2014)도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북한에서 제작한 선전용 엽서나 포스터 이미지를 왜곡한 작업을 선보이는 백승우의 ‘유토피아’(2008) 시리즈는 북한이라는 나라와 체제와 공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유럽 어느 한 공원의 풍경을 무심한 듯 담아낸 염중호의 ‘겉돌다’(2016)나 녹조 가득한 연못의 풍경을 찍은 박형근의 ‘무제2-녹색 연못’(2004), 폐교의 풍광을 드러낸 구성수의 ‘한알고등학교’(2001-2004) 역시 현실에 없는 느낌을 주는 것은 매한가지다.


4관을 나가면서 바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기 쉬운데, 전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앞으로 걸어나가면 주황색 바람벽에 정연두의 작품들이 한가득 걸려있다. 어린이들이 그린 크레파스화를 생동감 넘치는 사진으로 재현한 작품들이다. 아이들의 상상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진 행복한 결말이다. 사진작가는 물론 스타일리스트, 헤어디자이너들의 공력이 가득 들어있는 패션 화보를 커다란 화면으로 만나볼 수 있는 특별전 역시 놓치면 아쉬울 듯하다. ●


글 정형모 기자 hyung@joongang.co.kr,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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