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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 대선자금 '판도라 상자' 열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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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주당 정대철(鄭大哲)대표가 11일 폭발력이 강한 얘기를 했다. 지난해 대선 때 당에서 조달한 노무현 대통령 선거자금에 대해 일부 기밀을 털어놓은 것이다. 鄭대표가 선거자금의 은밀한 부분을 끄집어내자 여권은 경악하는 분위기다.

그는 이날 오후 5시쯤 기자들에게 대선 때 당에서 기업체 등으로부터 받은 돈이 2백억원가량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돼지저금통(모금액 약 80억원)은 빼고"라고 했다.

이에 앞서 오후 1시쯤엔 대선자금 전부가 꼭 적법하게 처리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말도 했다. "(대선 후원금엔) 이런 저런 돈이 섞여 있어 영수증 처리가 복잡하게 됐으며, 영수증 처리가 안된 돈도 많다"고 했다.

지난해 4월 치러진 당 대표 경선 때 얘기를 끄집어내면서는 "나는 경선자금으로 6억원쯤 썼지만 상대방은 10억, 20억원 썼다더라"고 했다. 마치 '돈 잔치'가 있었던 것처럼 말한 것이다.

그래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정치권의 초점은 이제 鄭대표 개인의 수뢰 혐의에서 盧대통령의 대선자금, 여당 전.현직 대표와 최고위원의 경선자금으로 이동했다. 그런 돈들이 과연 합법적으로 조달되고, 사용됐는가가 관심사로 부상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당장 "검찰이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청와대로선 허를 찔린 셈이다. 신주류 핵심인 鄭대표의 '폭탄발언'으로 대통령의 도덕성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盧대통령은 대선 때 주로 '돼지저금통 모금'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을 많이 했다. 깨끗한 선거운동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鄭대표의 '2백억원'얘기는 盧대통령의 개혁적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다. 기업체로부터 큰돈을 받았고, 일부는 영수증 처리를 하지 않았다면 정치자금법을 위반했을 수도 있다.

鄭대표와 李총장의 말이 다른 것도 문제다. 李총장은 지난 3월 "돼지저금통 모금액을 포함해 1백대 기업으로부터 받은 대선 후원금은 1백20억원"이라고 했다. 당시 문석호(文錫鎬)대변인은 "돼지저금통 모금과 수도권 시.도지부 후원금 모금액 6억원을 제외하면 순수한 기업 모금액은 36억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李총장은 11일 鄭대표 주장에 대해 해명하면서 "돼지저금통 모금을 포함해 1백50억원 가량 된다"고 말했다. 3월 얘기와는 다르다. 李총장은 "鄭대표는 당에서 50억원을 빌렸다 갚은 이정일(李正一)의원 것을 포함시킨 것 같다"고 했다.

그러자 鄭대표도 오후 6시45분쯤엔 "李총장 말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아까는 돼지저금통을 빼고 2백억원이라고 하지 않았느냐"는 기자들의 물음엔 "내가 그랬나"라고 했다.

이는 鄭대표의 착각일 수도 있다. 아니면 鄭대표의 소환과 사법처리 문제가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인 만큼 그가 자신의 카드를 슬쩍 보여주고는 다시 상황을 유동적인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먼저 한 발언을 희석시킨 일종의 전술일 수도 있다.

민주당 대선자금이나 대표 경선자금 문제가 쟁점화하고 만일 불법성이라도 드러나면 신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일정은 뿌리째 흔들릴 공산이 있다. 내년 총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국은 혼돈의 격랑 속으로 진입하고 있다.

이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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