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청전도 우리 붓 썼죠” 103년 이어온 서화가 사랑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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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인사동 ‘구하산방’에서 홍수희 사장이 1970년대 걸었던 간판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간판을 몇 번이나 바꿨는지 셀 수도 없다”고 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이게 쥐수염을 이용해서 만든 붓인데, 쥐수염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삼각형 모양이에요. 뻣뻣하고 힘이 좋지요. 추사 김정희 선생 같은 힘있는 글씨를 쓰는 데 딱 맞죠.” 지난 11일 서울 인사동(179-2번지) ‘구하산방(九霞山房)’에는 붓과 한지 등의 문방사우가 가득했다.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조용한 가게 안에서 손님들이 가리키는 붓을 꺼내 설명하는 홍수희(66) 사장의 목소리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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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암 이응노(左), 청전 이상범(右)

구하산방은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이다. 구하는 구천(九天)의 운하(雲霞·구름과 안개)라는 뜻이다. 따라서 구하산방은 신선이 머무는 산중의 공간을 의미한다. 1913년 일본인 상인이 개업한 이 가게에 우당 홍기대(95) 선생이 1935년에 점원으로 들어가 광복 이후에 인수했다. 홍수희 사장은 그의 조카다. 충무로에서 시작한 가게는 한국전쟁과 1·4 후퇴 등 한국사의 주요 고비에 이전을 거듭하다 1980년대에 인사동에 정착했다. 2013년에는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됐다. ‘사라져가는 한국 서예문화를 지켜내는 곳’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구하산방은 100년 넘는 세월 동안 전국의 내로라하는 서화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품질 좋은 물건만 가져다 놓아 고종, 순종도 구하산방 붓을 썼다”는 말은 요즘도 돌아 다닌다. “박수근, 이상범, 이응노, 천경자까지 우리집 문지방 안 넘은 화가가 없다”는 것이 홍 사장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그는 “청전 이상범 선생 같은 분이 돈을 못 벌던 시절에 와서 이 붓, 저 종이 만지작만지작 했다. 돈은 없는데 솜씨는 있으니 ‘연장’은 좋은 걸 쓰고 싶어했다. 그러면 그림 한 장 그려 받고 붓도 공짜로 줬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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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공짜 붓’을 내주면서도 1980년대 후반에는 하루 매출이 수 백만원이었다고 홍 사장은 설명했다. “경제도 잘 나가고 문화생활 욕구도 강해져 주부들이 너나할 것 없이 문화센터를 다녔어요. 우리집이 유명하다는 것을 알고 몰려 왔는데 붓, 종이가 불티나게 팔렸죠.”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필방
1980년대 하루 수 백만원 매출
중국산에 밀려 10분의 1로 뚝
“서예 관심 지킬 수 있으면 만족”

1990년대 인사동길이 문화의 거리로 지정되자 값싼 중국산 붓과 종이를 파는 필방이 속속 들어섰다. 구하산방의 매출은 ‘좋던 시절’의 10분의 1 이하로 떨어졌다. 인조모 없이 동물의 털만 뽑아와 가게에서 직접 붓을 만들던 방식을 고수할 수 없었다. 지금은 중국의 공장에서 물건을 만든다. 홍 사장은 “생산 방식은 현실에 맞게 바꿨지만 우리 기술자를 파견해 품질을 최대한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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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런 고집은 이 곳의 붓과 종이를 믿고 수십년간 오는 단골들 때문에 꺾이지 않았다. 이날 가게에 온 이동희(84) 전 서울과기대 총장은 “38년간 171권의 일기를 썼는데 다 여기에서 산 붓으로 썼다. 이 곳은 한국 문사철시서화(文史哲詩書畵)의 중심이다”고 말했다.

홍 사장은 요즘에는 매출은 포기하고 서예 문화를 지켜낸다는 뜻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서예는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문화입니다. 이 자리를 지키면서 우연히 들르는 사람들에게라도 서예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렵니다.”

글=김나한 기자, 김현재(숙명여대 4) 인턴기자 kim.nahan@joongang.co.kr
사진=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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