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치는 생명을 예술로 승화|호암갤러리 부르델조각전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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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이집트기자의 거창한 3대 피라미드와도 같이19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근대조각의 3대 거봉이 우뚝 솟는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봉우리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조각에다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로댕」이요, 그 좌우에 힘에 넘치고 열정적이며 남성적인「부르델」, 그리고 건강하고 충만한 관능과 정일(정일)에 찬「마올」의 두 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이다.
「로댕」과「부르델」과의 관계는 단순한 사제간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들은 다같이 인간적 진실이라는 이상을 향해 각기 독자적인 영역을 쌓아 올려가는 도정에서 서로 이끌리며 호응한 위대한 두 영혼이었다. 젊은「브란쿠시」가「로댕」으로 부터 그의 제자가 되기를 권유받았을 때『거목(거목)밑에서는 새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이를 거절한데 반해「부르델」이 나이 35세 때에「바다와도 같은」「로댕」의 조수로서 그 감화를 받기를 서슴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부르델」은 결코 그 감화속에 안주하지 않았다. 오히려「로댕」예술의 비밀을 터득함과 함께 그는 스승의「반역적인 제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꿰뚫어 본 사람이 다름 아닌「로댕」이었다. 「로댕」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모델링이다. 「부르델」에게 있어 그것은 건축이다. 나는 감정을 근육속에 가두어 놓지만 그는 감정을 양식속에서 치솟게 한다.」
「로댕」에 있어 모든 표면은 내면의 꿈틀거리는 감정으로 물결치고 있다. 그러나「부르델」에게 있어 그 파동치는 생명의 물결은 보다 염격한 정신적 규율속에 통합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육체라고 하는 인간적인 척도를 뛰어넘어 보다 보편적인 척도, 다시말해 생명이 있는 건축을 지향하는 것이다. 『단편으로 된 구체적인 생명 뒤에 생명의 총체에 의한 보편적인 높이』를 추구했다.
그에게 있어 생명의 순간적인 파동은 제2의적인 의미밖에는 지나지 않는다.
보다 중요한 것은 구조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요, 보편적인 리듬을 추구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하여「부르델」은 그의 조각 하나하나를 통해 생명의 질서에 장대한 모뉴먼트를 새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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