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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행주 기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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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기씨는 행주 단일본이다.
전국에 2만여명, 성별인구순위 80위.
3천여년의 긴 역사를 내세우는 오랜 성씨이면서도 수는 많지 않아「귀성」에 든다.
득성 시조는 기우성. 기자의 48대 왕자, 마한왕 기준의 7세손인 기훈의 세아들 가운데 맏이라고 기씨네 족보는 밝힌다. 아우 우량은「한」씨의 시조가 되고 막내 우평은「선우」씨의 조상이 되어 세 성씨는 한 핏줄이라는 설명이다.
기씨네는 우성으로부터 후대의 계보를 잃어 고려 인종때 평장사를 지낸 기순우를 1세로 세계를 헤아린다.
그에 앞서 고려개국공신에 기언이란 이름도 나오나 역시 계대는 못하는 형편.
행주 기씨가 특히 융성을 누리기는 고려 중엽 이후 약2백년간. 순우의 손자 윤위(대장군)·윤숙(대장군)이 고종때 무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탁성(부원수)은 조위총의 난에 평정군으로 참전하고 뒷날 정중부의 쿠데타에 가담, 참지정사를 거쳐 평장사에 까지 올랐다.
홍수가 최충헌에 협력, 역시 평장사에 오르는등 융성가도를 달리던 기씨네의 영화는 여말 기자오의 딸이 원에 궁녀로 뽑혀갔다가 원의 마지막황제 순제의 두번째 부인으로「황후」가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윤숙의 현손녀인 기황후는 14살의 어린 나이로 원의 궁궐에 들어가 뛰어난 미모와·재치로 순제의 사랑을 독차지, 정식으로 황후가 되고 아들은 원조의 대통을 이어 몽고의 왕(소종)이 됐던「고려판 신데렐라」다.
기씨가 황후가 되면서 당시 동아시아 세계를 지배하던 원실의 처가가 된 고려 기씨들은 위세가 하늘을 찌르게 됐다.
기황후의 아버지는 물론 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까지 모두 왕으로 추존됐고 오빠 기철과 기원은 고려조정을 쥐고 흔드는 실력자로 등장했다.
「기씨 천하」였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울게 마련, 기씨네 세력의 원천이었던 원은 그때 이미 국운이 기운 뒤였다.
1351년 고려에선 공민왕이 즉위했다. 왕은 주원장의 명이 지나본토를 원의 지배로부터 수복해가는 대륙의 풍운을 기회로 포착했다. 1백여년 원의 속박을 끊어내는 대개혁을 단행했다.
원이 점령한 옛땅이 수복되고 몽고풍은 추방됐으며 전통문화가 부활, 장려됐다. 역사대전환의 태풍은 기씨네의 영화 또한 뿌리째 날려버렸다. 외족의 주구로 지목된 기씨 일가는 「민족반역자」로 몰려 멸문지경의 보복을 당했다.
역사의 죄인으로 매몰된 기씨네를 다시 살려내 조선조에 오히려「명문」의 영예를 얻게 한 중여조는 기건이다.
그는 세종때 초야에 묻힌 선비였다. 세종은 그의 학덕을 듣고 발탁해 지평에 임명했다. 대사헌을 거쳐 벼슬이 판중추부사에 까지 이르렀으며 성품이 곧고 맑아 뒷날 청백리에도 뽑혔다.
단종이 임금이 되고 수양대군이 궁중에 무상출입하며 정치에 간여하자 그는『이는 정사를 어지럽히는 일이니 종실의 궁내출입을 통제할 것』을 상소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갈수록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를 죽이고 임금이 된 수양은 그의 인품과 덕망을 아껴 세차례나 그를 찾아 벼슬살이를 권했다. 그가 눈이 먼것을 가장하고 끝내 응하지 않자 세번째는 바늘로 눈을 찌르는 척해 시험했으나 곰짝도 않고 이겨내자 돌아갔다고 한다.
그의 증손이 기묘사화에 화를 입은 팔현 중 한사람인 기준이다.
고려말 멸문을 피해 흩어졌던 기씨들은 이무렵 사화를 피해 멀리 남도로 낙향, 전남을 중심한일대가 오히려 기씨네 본고장으로 바뀌게 됐다.
조선조 기씨의 명성을 천하에 드러낸 이는 고봉 기대승이다.
기건의 현손, 기준의 조카인 고봉은 일찌기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을 떨치고 명종때 대과에 올라 부제학·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퇴계 이황과 8년에 걸친「사단칠정론」서신논쟁은 조선조 학술사의 가장 빛나는 한대목이며 퇴계는 고봉의 탁견을 상당부분 수용하기도 했다.
벼슬에서는 광해조 영의정에 오른 기자헌이 행주 기씨를 대표한다.
고봉을 배출, 조선조 성리학의 한 학맥을 형성한 기씨네는 조선조말 다시 노사 기정진을 냈다. 그는 조선조「성리학의 6대가」로 까지 일컬어지는 거유.
그의 학통은 손자 기자만에 이어졌으며 그는 한말 왜의 침략에 의병을 일으켜「행동하는 지성」을 수범했다.
기삼연도 역시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기산도는 또 을사오조약의 오적가운데 하나인 군부대신 권중현을 저격하려다 체포돼 옥고를 치르는 등 국난기 기씨네의 충의전통은 빛난다.
조선조의 문과 급제자는 22명.
현대에 들어서는 법조계의 원로 기세훈, 전국회의원 기세풍, 기춘석 한대의대 내과과장, 기세록 전남대교수 등이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집성촌|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용리|기묘사화피해 정착…고봉 유적보존>
광주외곽도로를 타고 하남공단을 지나 임곡으로 들어서 북서쪽으로 4㎞.
옛 기와집과 슬레이트집들이 한데 어울려 한일자로 길게 펼쳐지는 마을이 한폭의 그림같다.
전남 광산군 임곡면 신용리 신촌마을 52가구 중 50가구가 행주 기씨 한성바지인 기씨촌이다. 기씨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1519년. 기진이 기묘사화로 화를 입고 전남으로 낙향, 이웃 용동마을에 정착했다.
전남을 피신처로 택한 것은 그가 영광에 먼저 자리를 잡은 강학손의 손자사위였으며 그의 어머니도 나주 오씨로 그의 외가·처가가 모두 전남이 연고지였기 때문.
그의 작은 아들이 유명한 고봉 기대승이다. 고봉은 아버지 진이 세상을 뜨자 건너마을인 두동으로 새집을 지어 옮겨살다 여생을 마쳤다.
고봉이 돌아간 뒤 후손들이 광산군 임곡면 광곡리 452 백우산 기슭으로 유해를 옮겨 묘역에 안장하고 산아래 마을을 이루어 기씨네 터밭이 된 것이다. 빙월당과 월봉서원 등 고봉을 기리는 유적들이 오늘까지 마을을 지킨다.
이곳 기씨네 마을의 자랑스런 전통은 충의정신.
임난때 고봉의 아들 효증이 의병을 일으켰고 그 정신은 한말 기삼연·기산도 등 의열로 이어졌다.
78년 이후 1억5천만원을 들여 월봉서원의 복설겸 빙월당 정화사업도 벌여 기씨네 자랑스런 조상 고봉의 유덕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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