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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도 3수, 선거도 3수 맘 먹으면 하는 ‘찐득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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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6호 4 면

1 정운천 당선자가 4·13 총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지난 3월 31일 시내에 함거를 끌고 나와 출정식을 갖고 “전주도 야당 한쪽만 가진 ‘외발통’(한 바퀴)이 아니라 여야 ‘쌍발통’(두 바퀴)으로 굴러가야 한다”고 지지를 호소했다.

2 정 당선자의 아들 용훈씨는 13일 간의 공식 선거운동 기간 내내 큰절 유세로 관심을 받았다. 3 정 당선자가 당선 비결로 꼽는 ‘셀카’. 2012년 이후 지금까지 찍은 셀카만 2만5000장을 넘는다. [사진 정운천 당선자]

어느 것 하나 단 한 번에 얻은 것은 없었다. 고등학교는 재수, 대학은 3수, 그리고 선거도 3수 끝 당선이었다.


그래도 기뻤다. 기적과 같은 승리였으니까. 이번 4·13 총선에서 세 번(2010년 전북도지사 선거, 2012년 19대 총선, 2016년 20대 총선) 만에 이긴 전북 전주을 새누리당 정운천(62) 당선자 이야기다.


그는 4만982표(37.5%)로 더불어민주당 최형재 후보를 불과 111표 차이로 앞섰다. 개표 종료와 재검표 순간까지 마음을 놓지 못한 살얼음판이었다. 전주에선 1984년 민주정의당 임방현 의원 이후 32년 만에, 전북에선 96년 신한국당 강현욱 의원이 군산에서 당선된 후 20년 만에 여당 의원이 배출되는 순간이었다.


“어휴~ 여유 있게 앞서고 있는디 막바지에 지역구 바깥의 사전투표자 투표함이 열리니까 마~악 치고 올라오는 거여. 전주 밖에 있는 유권자들은 나를 안 만나봤으니까 다 민주당 찍지. 사전 투표함이 한 개만 더 나왔으면 뒤집혔을 거여. 긴장돼 죽는 줄 알았어요.”


20일 서울 마포구 상암동의 카페에서 만난 기자에게 짜릿한 개표 상황을 회상하는 그는 양복 차림이 어딘지 어색한 평범한 시골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실패와 도전에 익숙한 그에게도 이번 도전은 간절했다. 매번 결실을 본 과거의 도전과는 달리 어쩌면 실패로 끝나버릴지 모르는, 아니 그럴 가능성이 컸던 마지막 도전이었기 때문이었다.


#진정성 보이려 교사 아내 퇴직 설득여당 불모지에서의 도전은 2010년 전북도지사 선거 출마가 시작이었다. 2008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퇴임 후 이명박 대통령의 끈질긴 권유에 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누군가 가야만 하는 길이라면 내가 가겠다”고 결심을 했다. 그는 고등학교 윤리 교사였던 부인 최경선(55)씨에게 직장을 그만둬 달라고 부탁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전북도지사에 출마하려면 ‘아내의 안정된 직장 포기’ 정도의 진정성은 보여야 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년만 더 근무하면 퇴직금 1억2000만원이 보장된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먹고살 만하지 않느냐”는 정 당선자의 부탁을 아내가 받아들이기까지 꼬박 열흘이 걸렸다.


고향인 전북 고창을 떠난 지 37년 만의 귀향, 생애 처음 출마해본 도지사 선거에서 얻은 득표율 18.2%는 그래도 의미 있는 성과였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는 교훈을 그는 온몸으로 체험했다. 행사에선 찬밥 취급받기 일쑤였고 시의원에게 인사말 기회를 주는 자리에서도 전직 장관 정운천에 대한 배려는 없었던 황무지였다. 낙선 이후 대학 총장이나 기관장 등을 맡으라는 제안을 뿌리치고 그는 연고도 없는 전주에서 19대 총선에 다시 나섰다. 도지사 선거 때와는 달리 총선 출마는 그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는 “도지사 선거에서 18.2%를 득표하면서 지역주의를 타파해야겠다는 신념이 생겼다. 그냥 필(feel)이 꽂혀버렸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11.2%포인트 차의 또 낙선이었다. 그가 20대 총선에까지 나서겠다고 하자 부인은 “이 정도면 충분히 했다. 이제 그만 고생하자”고 반대했다. 그는 “이번에도 떨어지면 내 역할은 여기까지로 하고 다시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다독거리며 설득했고 마지막 도전에 뛰어들었다.


정 당선자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만 믿었다. “소외감으로 응어리진 전주의 아픔을 풀어주는 방법은 낮은 자세밖에 없다”며 부인과 함께 무조건 바닥을 누볐다. 유권자들과 한 명 한 명씩 모두 대면하는 걸 목표로 삼았다. 부인 최씨가 일부러 민주당원이 운영하는 세탁소에 세탁물을 맡긴 뒤 세탁소 주인과 친분이 생기면 정 당선자를 데리고 가서 인사를 시키는 방법도 썼다.


시간이 날 때마다 자전거로 지역구 곳곳을 누볐다. 하지만 그 많은 시민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낸 아이디어가 휴대전화로 찍는 ‘셀카(셀프카메라)’다. 만난 사람 한 명 한 명을 소중하게 기억하겠다는 의미였다. 처음엔 너무나 쑥스러웠다. 집에서 셀카를 찍는 연습도 했다. 그가 ‘셀카’를 찍자고 할 때 “저번에 찍었는데요”라며 거부하는 이들에겐 “그땐 봄이었고 지금은 가을이니까 계절마다 찍어야지요” 하면서 끝까지 찍었다. 2012년부터 3년여 동안 찍은 셀카는 2만5000장을 넘었다. 이렇게 모은 셀카로 현수막을 만들어 지난해 12월 가졌던 출판기념회 때 게시했다. 이 현수막은 아직도 완산구 효자동에 있는 정 당선자의 선거사무소에 걸려 있다.


#공약 불발되자 함거 타고 죄인 행세‘함거 석고대죄’도 지역에선 유명한 스토리다. 2011년 5월 전북도지사 선거에서 ‘인생과 정치생명을 걸고’ 공약했던 한국토지주택공사(LH) 전주 이전이 불발되자 전주의 대문 격인 호남제일문 앞에 함거(고려·조선시대 죄수를 호송하던 수레)를 마련해 스스로를 이곳에 가두었다. 백의를 입고 함거 안에 앉아 있는 정 당선자에게 “쇼하지 말라” “차라리 청와대 앞에 가서 하쇼”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민심은 조금씩 움직였다. 음식 장사를 하는 할머니가 주먹밥을 건네줬고 음식배달 일을 하던 청년은 음식값 3000원을 함거 속에 집어넣고 달아나기도 했다. 민심을 대하는 진정성 있는 노력이 이번 승리를 불렀다고 그는 믿고 있다.


정 당선자가 쏟은 정성은 전주에서 만난 시민들의 입에서도 확인됐다. 그의 단골식당인 효자동의 한식당 송원정을 운영하는 추옥금(62·여)씨는 “처음엔 모르는 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안녕하세요’ 하길래 못 본 척하니까 ‘저 정운천입니다’ 하면서 먼저 다가오는 모습에 감동했다”고 했다. 정 당선자가 선거운동 동안 몇 번씩 방문했다는 지역구 내 삼천동 행복이용원 이발사 신남철(55)씨는 “새누리당은 뽑아주기 싫은데 자꾸만 정운천에게 마음이 갔다”고 했고, 삼천동 호프집 진진가맥 주인인 이진숙(55)씨는 “여기 단골이 다 민주당 사람들인데 내가 정운천을 지지하니까 단골이 70%나 떨어져 나갔다. 국회의원 제대로 못하면 나부터 등을 돌릴 것”이라며 웃었다. 대부분 과거엔 야당 후보들을 뽑았던 사람들이었다.


예비후보 등록 이후 총선일까지의 120일간은 가족 모두의 총력전이기도 했다. 선거운동 때문에 서울의 금융회사를 일부러 그만둔 아들 용훈(28)씨는 “전주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달라”고 길거리에서 계속 큰절을 했고, 미국의 대학을 휴학한 딸 다은(24)씨는 유세차량에 뛰어올랐다.

당선이 확정되자 가족과 함께 환호하는 정 당선자(오른쪽에서 둘째). 그의 왼쪽은 아내 최경선씨. [뉴시스]

#‘신지식 농업인’으로 교과서에도 등장정 당선자의 별명은 ‘무대포’와 ‘찐득이’다. 이 중 찐득이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붙여줬다. 정 당선자는 2012년 대선 때 김무성 당시 선대본부장에게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전주 이전을 대선 공약에 넣고 법으로 만들어 실행을 약속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김 본부장이 즉석에서 당에 전화를 걸어 법안 발의를 요청했고 “정말 찐득이처럼 딱 달라붙어서 못살겠다”고 혀를 내둘렀다. 천사불여일행(千思不如一行·천 번의 생각보다 한 번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뜻)이라는 좌우명을 가진 그를 인생의 고빗길마다 살린 것도 ‘끈질긴 찐득이 기질’이었다. 그는 익산 남성고에 재수 만에 기어이 합격했다. 특히 대학에 3수 끝에 입학한 것도 고려대 농업경제학과만을 목표로 했고 다른 학교나 전공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학 졸업 후 1981년 연고도 없는 전남 해남 땅끝마을로 내려가 시작한 키위 사업이 농산물 시장 개방 등으로 두 번이나 큰 위기를 맞았지만 최초의 농민주식회사인 참다래유통사업단을 조직해 버텨냈다. 국내 키위 브랜드 ‘참다래’를 키우고 산지와 소비자의 직거래가 가능한 유통시스템을 정착시킨 그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신지식 농업인’으로까지 등장하게 됐다.


정치권과 아무런 인연도 없었던 그가 장관에 깜짝 발탁된 것도 “목표를 세우면 앞뒤 안 가리고 질주하는 기질”(45년 지기인 이완수 당협위원회 사무국장) 덕이었다. 2007년 대선을 두 달 앞두고 열린 간담회에서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만나게 된 그는 “농업은 생산에서 가공·유통·판매·수출까지 포괄하는 복합 산업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단순한 농림부를 넘어 수산업과 식품까지 결합한 농림수산식품부를 출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명박 후보는 이를 대선 공약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선 뒤 농림수산식품부 공약이 없던 일이 되려 하자 그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에게 편지를 보냈고 결국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그의 장관직은 순탄치 못했다. 취임하자마자 광우병 쇠고기 파동이 터졌고 연일 촛불집회가 벌어졌다. 그는 2008년 6월 10일 광화문 촛불집회 현장에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소통하겠다”고 등장했다. 같은 달 27일엔 국민농산물품질관리원 대전지원에서 열린 간담회장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과 충돌했다. 몸싸움으로 양복이 찢어지고 안경이 깨지는 와중에도 그는 시위대에 대화를 제의했고 대화가 끝나갈 무렵 한 아이가 내민 달걀을 받았다. 시위대 속에 있던 아이의 엄마가 장관에게 던지려고 했던 달걀을 아이를 통해 건넨 것이다. 정 당선자는 내용물을 빼고 계란 껍질을 박제해 아직도 보관 중이다. 평생 ‘소통’의 중요성을 마음속 깊이 새기겠다는 각오였다.


그는 새누리당의 공천 파동에 단호한 입장이었다. “난 친박도, 비박도, 친이도 아니다”며 “이번 총선이 새누리당 공천 파동에 대한 국민의 무서운 심판이었으니 답은 다 나왔다. 모두 다 석고대죄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회의장 문제에 대해서도 “의석이 많은 더민주에 줘야 한다. 무소속을 복당시켜 억지로 빼앗는 것은 국민의 뜻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영호남 지역 격차를 줄이는 지역균형발전법을 꼭 만들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중앙SUNDAY와의 인터뷰 뒤 그는 “꼭 할 일이 있다”며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기자에게 셀카를 함께 찍자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걸로 당선됐거든~.”


추인영 기자 chu.in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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