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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크로닉'이 던지는 죽음에 관한 질문…우리는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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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끝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문명과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우리는 삶에서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결정할 수 있게 됐다. 현대인이 품은 최고의 욕망 중 하나는, 죽음의 순간마저도 인간다울 수 있기를 꿈꾸는 것이 아닐까. 인간다운 죽음을 꿈꾸는 이라면 이 영화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크로닉’(원제 Chronic, 4월 14일 개봉, 미셸 프랑코 감독)은 불치병 환자들의 마지막 순간을 돌보는 호스피스 간호사에 대한 이야기다. 죽음의 문제를 다룬 최근의 어떤 영화보다 날카롭게 존엄사 문제를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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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죽음’에 대해 막연한 환상이 없는 사람도 있을까. 나는 병원에서 죽기보다 집에서 죽기를 바란다. 곁에서 손잡아 줄 이는 가장 가까운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많은 사람의 눈물겨운 배웅은 원치 않는다. 유골은 화장하여 산이나 강에 뿌리면 된다. 아름다운 유언을 남기고 싶지만, 아직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는가. 우리는 죽음의 이미지를 상상할 뿐 결정할 권한이 없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의 곁에서 죽을지 그 무엇도 지휘할 수 없다. 우아하고 차분하며 정갈한 죽음을 꿈꾸는 우리의 열망은 이 결정 불가능성 앞에 한가로운 사치가 돼 버린다.

수많은 영화와 문학 작품 그리고 실제 인물들의 죽음을 봤지만 바람직한 죽음이란 없었다. 모든 죽음은 어처구니없었고, 잘 모르는 사람의 죽음조차 늘 충격이었으며, 사랑했던 이들의 죽음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마디로 우리는 죽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크로닉’은 어떻게 죽을지 평소에 조금이라도 준비해 두면 더 나을 것이라 믿었던 우리의 환상을 무참히 박살내 버린다. 누구에게든 더 나은 죽음이란 없다. 감성의 물기를 모조리 제거한 듯 흐르는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환상을 모두 제거하고, 단지 죽음 자체를 정면으로 응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역시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 그린 ‘아무르’(2012, 미카엘 하네케 감독) ‘스틸 앨리스’(2014, 리처드 글랫저·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와 비교할 때 ‘크로닉’의 화법은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지식인 노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아무르’는 ‘당신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차라리 먼저 떠나보낸다’는 애절한 감성의 물줄기를 담았고, ‘스틸 앨리스’는 ‘엄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린 뒤 비로소 되찾은 막내딸의 눈물겨운 사랑’이라는 멜로적 요소가 일부 녹아 있다.

반면 ‘크로닉’의 이야기는 그 어떤 눈물의 물꼬도 마련하지 않은 채 오로지 앞만 보고 질주한다. 그 이야기가 달려가는 곳에는 오직 죽음만이 놓여 있다. 죽음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인간의 절망 앞에서 주인공 데이비드(팀 로스)는 호스피스 간호사로서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낸다. 그는 환자가 느낀 절망을 그들의 가족보다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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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는 단순한 직업의 의미를 뛰어넘는 그 이상을 해낸다. 근육의 힘이 다 빠져나가 혼자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환자를 마치 연인인 듯 다정하게 보살피고, 뇌졸중에 걸려 팔다리가 마비된 환자와 함께 아이패드로 음란 동영상을 보며 키득거린다. 그는 자신이 오래 보살피던 환자 세라(레이첼 픽업)가 죽자, 모두가 곁에 다가가기 꺼리는 시체를 정성스레 닦는다. 그의 곁에 남은 마지막 사람이 되어 주는 것이다. 세라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혼자 들른 술집에서 옆자리 사람들이 말을 걸자, 데이비드는 이렇게 답한다. “20년 동안 함께 살던 아내가 죽었어요.” “아내의 병이 무엇이었나요?”라 묻는 그들에게 데이비드는 여봐란듯이 차갑게 대꾸한다. “에이즈요.” 그 장면에서 데이비드는 마치 세라가 진짜 20년 동안 자신과 함께 산 아내인 것처럼 말한다.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없이 말이다. 자신이 돌보던 환자의 고통을 자기 일인 듯 느끼는 데이비드의 모습은, 환자와 간호사의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필사적이다. 그것은 인간적 보살핌이라기보다 스스로를 끝없이 채찍질하며 환자와 같은 고통에 몰아넣는, 마치 금욕 생활하는 구도자 같다.

알고 보니 그는 과거에 회생 가망이 없는 암 환자였던, 사랑하는 누군가를 직접 안락사시킨 적이 있다. 그것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이자 평생의 굴레로 그를 따라다닌다. 그 가족은 데이비드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로 오랜만에 그들과 만난 데이비드는 극 중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다. 이제야 그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환자들의 죽어 가는 삶에 의지해 자신의 꺼져 가는 삶을 불태울 생(生)의 연료를 발견하던 데이비드. 그의 가슴에 난 영원한 구멍은, 바로 사랑하는 이를 직접 죽였다는 죄책감이다.

그는 때로는 강인한 초인처럼, 때로는 무적의 용병처럼 호스피스 간호사의 임무를 완수한다. 마침내 한 말기 암 환자는 데이비드에게 엄청난 요구를 한다. 그는 완강하게 거부하지만 환자의 고통스러운 절규를 무시할 수 없다. 결국 단둘이 죽음의 의례를 치르는 순간, 나는 데이비드가 틀렸다고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스크린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주사기를 든 그의 손을 붙들고 싶다. “제발 무슨 말이라도 좀 해요”라 소리치고 싶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기계 장치를 나사로 조이듯 그 작업을 수행한다. 죽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는 헤르메스(Hermes·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혼을 인도하는 신)나 바리데기(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저승 세계를 지나간 바리공주에 대한 한국 무속 신화)처럼 망자를 죽음까지 무사히 인도하는 다정한 안내자가 아니다. 그는 차라리 하데스(Hades·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 혹은 죽음의 세계)의 입구를 지키는 머리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Kerberos)처럼 냉정하게 죽음의 길목을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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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에게 ‘아무 내용 없는 그 자신의 삶’을 대체하는 것은 바로 ‘죽어 가는 환자의 삶이 지닌 사연과 욕망과 감정’이다. 영화를 보면서 그가 두려운 동시에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는 훌륭한 의사나 따스한 호스피스 간호사는 아니지만 죽음의 전문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마지막 장면은 그조차 죽음의 전문가가 아님을 뼈아프게 증언한다. 데이비드를 통해 영화는 ‘그 누구도 죽음의 순간과 방법, 그때의 표정을 선택할 수 없다’는 냉엄한 진실을 쓰라리게 역설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을 넘어 ‘당신은 진정 인생의 마지막 모습을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조금 더 섬세한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나는 막연히 ‘내 죽음은 지극히 평온하고 침착하리라’ 오랫동안 다짐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내 죽음은 매우 평화롭고 우아하길 바라던 마음 또한 일종의 자만심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 마치 DIY 가구를 디자인하듯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 결국 우리가 고민할 수 있는 건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아니라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어떻게 자존감을 잃지 않을 것인가’가 아닐까.

우리는 죽음의 미장센을 선택할 수 없다. 죽음을 둘러싼 그 모든 미장센은 살아 있는 인간의 판타지일 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인 ‘크로닉(Chronic)’은 ‘만성적인’ ‘고칠 수 없는’ 병을 가리킨다. 진정 고칠 수 없는 우리의 병. 그것은 내 삶과 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 장밋빛 환상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투쟁하고 싶다. 죽음의 순간, 그 마지막 들숨과 날숨의 향기마저도 평생 지켜 온 사랑·우정·열정이 깃든, 그런 뜨거운 삶이기를.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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