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판결뒤의 법정대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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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민정당사농성사건처럼 나도 학생들을 집행유예로 출감시키려는 마음이 누구보다 못지 않았다』
『피고인들은 서울대를 대표하는 학생답게 조리있는 답변과 진지한 태도로 재판에 임하는등 공판협조를 많이해줘 고맙다.』
2일 서울지법남부지원 1호법정.
서울대 외부인감금사건의 선고를 끝낸 이원국판사는 법정이 소란해지자 퇴정한 피고인5명을 이례적으로 다시 법정으로 불러들여 판결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불과 1주일전 민정당사 농성사건의 재판부가 선고직후 법정을 재빨리 빠져나간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이판사의 부르튼 입술과 진지한 표정에서 고심 끝의 판결선고란 것을 누구나 읽을수 있었다. 갑자기 법정이 조용해졌고, 처지는 다르지만 법을 전공한 선후배간의 「법정대화」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는 분위기가 됐다.
이날 선고공판은 시작부터 파격이었다.
이판사는 선고에 앞서 피고인들에게 결심공판때의 최후진술에서 못다한 말이 있으면 해보라고 기회를 다시 줬다.
이정우군 (23·공법학과4년제명·전서울대 총학생회장)이 기다렸다는듯 『이번사건은 단순한 형사사건이 아닌 정부의 학원탄합등 대학원정책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파악돼야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이판사가 물었다.
『공소부분이 유죄라고 생각하느냐』
피고인석의 백태웅군 (23·공법학과4년·제명·전서울대 총학생회장)이 답변했다.
『제가 배운 지식으로는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이판사가 고개를 끄덕이며『법공부를 좀 더해야겠군』하고 웃으면서 말하자 법정분위기는 한결 가벼워졌다.
이어 선고를 하자 피고인석과 방청석에서 『학원탄압중지』『사법권 독립』이란 구호가 터졌고 이판사가 다시 피고이들을 불러들인 것이었다.
이판사는 『범행동기가 흥분된학생들사이에서 일어난 우발적인것이며 진지한 법정태도로 유리한 정상참작의 요인이 있으나 이번 폭력·협박사건은 학생운동의차원을 벗어났다』고 설명했다.
이판사는 『이정우군은 스스로 이번사건이 학생운동사에 일대오점이라고 규정하면서 진지한자세로 임했다』고 말하면서 학생들의 최후진술에서 느꼈던 자신의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소란하던 법정은 이판사의 차분한 태도에 차츰 진지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최근일련의 대학생시위사건공판때마다 계속되어온 해프닝은 재연이 어울리지않는 분위기가 됐다.
『불만이 있으면 항소 상고를 하십시오. 정부익 정책적인 감면혜택도 기대해 보십시오』
이판사의 마지막 「조언」에 피고인석과 방청석의 가족·동료대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져보이는 것은 기자만의 느낌이었을까. 방청석에서 누군가 혼잣말을 하는 것이 들렸다
『교수·당국과의 대화가 이렇게 진지하게 이뤄질수 있었다면 학생들은 법정에 서지 않아도 됐을것을…』
불과 2O분간의 짧은 대화였지만 많은 사람의 가슴에 와 닿는것이 있었고 그만큼 이판사가 앉은 법대가 높아보일수 없었다.
박보균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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