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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패배를 기대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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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혜수
JTBC 디지털뉴스룸 부장

#에피소드1

한국이 연장전 골든골로 2대 1 역전승했던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이탈리아와 16강전. 엊그제 같으면서도 까마득한 그날의 기억을 소환한 건 경기 다음 날 벌어진 일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을 전담 취재하던 후배 기자는 이튿날 “이탈리아 숙소에 난리가 났다”고 보고했다. 이탈리아 선수단은 숙소였던 충남 천안의 한 은행 연수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한국을 떠났다. 패배를 받아들이기도 싫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들은 엉뚱한 데다 화풀이했다. 가구 등 집기는 성한 걸 찾기 어려웠고, 벽은 주먹과 발에 맞아 구멍투성이였다.

이탈리아는 그해 연말까지도 심판 매수설 등을 퍼뜨리며 한국에 대한 비난을 이어 갔다. 당시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페루자 소속이던 안정환은 인종차별적 모욕까지 당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팀을 떠났다. 이탈리아의 이런 모습은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한국에 지고도 품격을 잃지 않았던 스페인 대표팀과 대비돼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에피소드2

지난달 24일 프로배구 남자부 챔피언 결정전이 OK저축은행의 우승으로 끝났다. OK저축은행의 2년 연속 우승인 데다, 현대캐피탈로서도 준우승이니 모두 잘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현대캐피탈은 정규 시즌 후반 18연승을 달리며 1위로 챔피언 결정전에 직행했다. 게다가 정규 시즌 동안 OK저축은행을 상대로 4승2패, 특히 후반기는 3전 전승의 절대 우위였다. 그런 현대캐피탈이 챔피언 결정전에서 1승3패로 무너졌다. 18연승의 현대캐피탈이다 보니 자타가 정규 시즌과 챔피언 결정전 통합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건 14년 전 그 누구도 월드컵 우승 후보 이탈리아가 한국한테 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과 같다. 그런데 상상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게 현실이다.

현대캐피탈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스페인처럼 행동했다. OK저축은행이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던 순간, 여느 팀처럼 고개를 떨구고 코트를 떠나는 대신 자리를 지키며 승자에게 박수를 보냈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즉 4·13 총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지난 8~9일 사전투표가 진행됐다. 선거운동 기간을 포함한 총선 전체를 축구 경기라고 한다면 후반전 종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셈이다. 13일 밤 12시를 전후해 당락이 드러나면 후보자들 간 희비도 갈릴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는 낙선자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싸움을 거는 낙선자도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엔 저 나름의 이유가 있을 테니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바라는 건 이 모든 일에 있어 품격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거다.

이세돌 9단은 알파고와 대결 제3국에서 진 뒤에도 “이번 패배는 이세돌이 진 것이지 인간이 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품위를 지켰다. 모두가 이 9단처럼 될 수 없지만 최소한 그리 되도록 노력할 수 있진 않은가.

장혜수 JTBC 디지털뉴스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