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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연안 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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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연안 김씨는 조선조 성종∼인조대의 손꼽히는 명문이었다.
연산조의 무오·갑자사화, 중종반정과 기묘사화, 임진·정유왜란, 광해의 폭정과 인조반정 등으로 이어지는 격동기에 중앙정계에 진출해 정승 6명, 대제학 3명, 왕비 1명, 청백리 3명등을 배출, 두각을 나타냈다.
김전(중종·영의정)은 연안 김씨를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 성종 때 문과에 급제,호당에 뽑혔고 연산 때 예안 현감으로 재직 중 무오사화로 파직, 갑자사화 때 대사성으로 재기용되었으나 다시 좌천됐다가 중종반정 후 복직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후 벼슬은 영의정에 이르렀고 청백리에 뽑히는 영예를 누렸다.
그의 후손에서 정승 3명, 왕비 1명 등이 나와 연안 김씨는 전성기를 맞았다.

<왕실과 사돈맺어>
성종 때 문과에 장원, 공조참의 등을 지내고 청백리에 뽑힌 김흔은 그의 형이요, 연산군때 대제학 김감은 그의 재종제가 된다. 김감은 연산군이 좌의정에 임명했으나 이를 사양하고취임을 거부했던 현신. 그는 이 같은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중종반정 후의 정치적 보복 속에서도 화를 면했고 병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중종 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른 김근사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연안 김씨는 중종 때 권신 김안로 (영의정)를 배출하면서 그 세력이 절정에 이른다. 중종초기 대제학이었던 그는 아들을 공주와 결혼시켜 왕실과 사돈 간이 되면서부터 권력남용이 잦아 당시 권신이었던 남곤·심정 등의 탄핵을 받고 한때 풍덕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 후 예조판서로 다시 정계에 복귀, 정적 심정을 숙청하고 좌의정에 올랐다. 이때부터권신 김안로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중종32년 문정왕후의 폐위 기도사건과 관련, 정적 윤원형 일파에 몰려 실각하고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광해조에 있었던 「인목대비의 폐위」와 「영창대군의 억울한 희생」은 연안 김씨 문중의한(한)이 되어 전해 내려오는 역사의 비극이다.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는 정비인 의인왕후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하자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맞이한 인목왕후(연안 김씨 김제남의 딸)가 영창대군을 낳자 왕의 마음은 영창에게로 기울기 시작했다. 왕이 이같이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자 당시 영의정 유영경은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책략을 세운다.
이때부터 유영경을 정점으로 하는 소북파는 광해군을 지지하는 정인홍 등 대북파와 권력쟁탈을 위한 암투를 벌인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광해가 왕위에 올랐다. 대북파가 판정승을 거둔 셈. 대북파는 유영경 등 소북파를 가혹하게 숙청, 정권을 장악했다. 이어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만들어 강화로 귀양보냈다가 살해했다.
이때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3형제도 사사되는 비운을 맞는다. 이 「폐모살제」의 비극이 곧 「계축옥사」다. 연안 김씨는 이 시기에 된서리를 맞았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명예를 회복했고 영조∼고종 대에 김욱 (정조·영의정) 김재찬(정조·영의정) 부자, 김유연 (고종·우의정=김재찬의 손자) 등 한 집안에서 3명의 정승을 배출, 명성을 떨쳤다.
연안 김씨의 시조는 고려 명종 때 사문박사 김섬한. 그이전의 선계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초기 김알지의 후손으로 두 형제 (이름미상)가 있었는데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형은 강릉으로, 아우는 연안으로 유배되었다는 설이 구전되고 있을 뿐, 시조 섬한은 아우의 후손으로후대에 와서 유배지 연안을 고향으로 삼았다.

<문과급제 백75명>
시조 김섬한의 5대손 김도는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우왕 때 밀직제학을 지냈다. 그의 아들 김자지는 조선초기 형조판서를 지냈는데 음양·천문·지리·의약·음률에 이르기까지 통달했던 석학. 동생 김하도 예조판서를 지냈는데 중국어에 능통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수 차례 왕래했던 외교관이었다.
이밖의 조선의 인물로는 김효성 (세조·병판), 김로 (순조, 병·호판, 대사헌), 김선 (정조·대사간·형판), 김위 (예판·제학) 등이 있다.
조선조의 문과급제자수는 총1백75명. 평북 정주에서 50여명의 급제자를 냈다.
일제의 암흑기에 상해임시정부요인으로 활약했던 김사목, 미국「윌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이승훈 등과 함께 작성했다가 옥고를 치른 김지환, 해방직후의 격동기에 검찰총장·대법관·대한변협회장 등을 지낸 김찬영도 돋보이는 인재들.
연안 김씨는 해방 후 사회각계에 많은 인재를 냈다.
김원기 (전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김덕주 (전대법원판사) 김윤경 (대전지방법원장) 김명복 (경희대부총장) 김귀수 (정박·미오하이오주립대 교수) 김종운 (서울대교수) 김종환(호남정유부사장) 김건기 (평화산업사장) 김종성 (해태유지사장·대종회장)등이 대표적인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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