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싶은이야기들<4230>|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63) 조 용 만|암흑기의 문화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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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상으로 1920연대 후반으로부터 시작해 1930연대의후반까지에 이르는 우리나라 문화계의 움직임을 대략 훑어보아온 셈인데, 1936년8월 남취낭이 조선총독으로 부임해온 뒤부터는 국내정세가 급변해갔다.
남취낭이란 인물은 일본 관동군소장파의 대륙정책에 편승해 1931년의 만주 강점이 성공되자 만주국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어 사실상의 만주 총독노릇을 해온 미련하고 저돌적인 인물이었다. 이자는 만주에 있을때 조선을 완전히 저희들 말마따나 「황민화」해 일본사람으로 만들어 놓아야 저희들의 대륙침략에 후환이 없을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 조선총독이 되자마자 「황민화」정책을 강력하게 불도저식으로 밀고 나갔다.
그때까지의 「내선융화」를 「내선일체」로 바꾼다음 「국어상용」「신사참배강요」「지원병제도 실시」「조선어 폐지」「조선문신문폐지」, 그리고 「창씨개명의 실시」로 조선사람을 깡그리 일본사람으로 만들어가려는 작업을 강력하게 급속히 추진시켜갔다.
이어서 저희들이 꾸민 각본대로 1937년 7월 노구교사건을 일으켜 중일전면전쟁이 터지자 남총독은 즉시 『전시체제령』을 발표해 조선사람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았다.
그러므로 1937년이후로 조선에서는 그나마 허용되었던 정상적인 문화활동을 할수없게 되었다. 모든 문화활동이 일본의 침략전쟁의 앞잡이로 이용되어 민족적인 반일적인 일체의 행동이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문화활동은 암흑기에 들어가지 않을수 없게되었다.
이런 절망속에서 상허는 1939년2월부터 순문예잡지『문장』을 창간하여 쓰러져 갈지도 모르는 우리나라의 우리말로된 문학에 한가닥의 혈노를 타개하였다. 이리하여 『문장』은 많은 우수한 작품을 산출해 문단에 한때나마 활기를 부어주었다.
『문장』과 동시에 평론가 최재서도 1939년10월 문예지 『인문평논』을 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잡지는 창간호에서부터 『동아신질서의 건설』을 역설하더니 1941년4월 『문장』과 함께 총독부의 명령으로 폐간되자 그해10월 그때의 국어, 즉 순일본말만 쓰는 문학잡지 『국민문학』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때의 『문장』은 소설을 주로한 작품중심의 문학잡지였고『인문평론』은 비평을 주로한 평론중심의 문학잡지였다.
어쨌든 이런 폭풍전야의 시대에 우리 말로된 순수문학잡지를 발간한다는 것은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였다.
더구나 『인문평론』은 권두언에서 「삼가 황실의 이 번영을 봉송한다」느니 「내선일 체의 문화적 이념」같은 문예잡지답지 않은 논문을 실어왔지만 『문장』 은 마지못해 「전선문학선」같은것을 실어오다가 마침내 일본작가 좌등춘부의「문화개발의 길」, 이등정의「국민문학의 기초」같은 글을 싣게되자 드디어 1941년 4월사고로 『본지 문장은 국책에 순응하여 제3권4호로 폐간합니다』고 잡지발간을 끝내버렸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이미 그전해 1940년 8월에 폐간되었었다.
남총독은 취임초에 시국의 증대성에 외면하여 전쟁에 협력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단체에대해서는 단호한 처치를 취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었는데 얼마 안가 이것이 현실로 나타났다.
총독부경무국은 드디어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을일으켜 안창호등 동우회회원 1백50명을 검거하였고 다음해 1938년 2월에는 흥업구악부사건을 일으켜 신흥우·최두선등YMCA를 중심으로 한 문화인을 대량검거하였다. 이로써 눈에 가시같은 전쟁협력을 거부하는 지식인들을 뿌리째 뽑아 없애버리고 만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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