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슈퍼맨"을 바라지 않는다|"선택의 포기"는 생명·자유·행복의 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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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내 이름은 「이슈마엘」 이라 불러두자』 이것은 미국작가 「허먼· 델빌」의 소설 『백경 (백경)』속에 등장하는 우수에 찬 아름다운 프롤로그다.
지상의 삶에 권태를 느낀 청년「이슈마엘」은 수부가 되기 위해 바다로 나간다. 포경선의 선원이 되어 배에 오르던 날 그는 그 배의 마스트에 기댄 채 이렇게 독백한다.
『배에 오르면 난 결코 선장이나 제독이나 손님은 되지 않을 것이다. 난 언제나 아름다운 선원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종종 미국의 민주주의가 바로 이 흰 고래의 뱃속에서 나왔다고 선언한다. 민주주의란 결코 선장이나 제독이나 손님 노릇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오직 생명을 지닌 한 인간이 정직하고 열정에 찬 선원으로서 자유와 평등을 소유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입춘도 지난 이 2월의 아침은 언제나 라일락 마른 가지 끝에 얹혀있는 낯선 유인물들로부터 시작된다. 새벽녘 문을 열고 나서면 남몰래 패혈증을 앓고있는 녹슨 대문 아래쯤엔 언제나 밤새 누군가 집집마다 던져 넣은 것이 분명한, 소인도 없는 익명의 유인물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바야흐로 이 2월은 선거의 절기인 것이다.
그 유인물들을 펼칠 때마다 우리를 전율하게 하는 것은 맞춤법도 엉망인 그 난폭한 철자법들이다. 인쇄 잉크를 한 드럼쯤 부어 만든 듯한 그 광기에 찬 검은 고딕체들은 치졸한 문구와 형편없는 맞춤법 때문에 마치 대문을 밀치고 달려 들어온 육식동물을 연상케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인물 갈피 속에 삽입돼 있는 입후보자의 국회발언 사진들이다. 사진들은 이상하게도 동일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모두 성대가 벗겨져 나갈 정도로 발언대 앞에서 악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마치 자객들을 뽑아 국회로 보낸 것 같은 낭패감에 사로잡힌다.
그 유인물을 다 읽은 후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어처구니없게도 몇 사람의 낯선 거인들이다. 그들의 공적과 공약은 너무도 엄청나서 우리를 외로움 속에 실족시킨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슈퍼맨」 이나 「헤라클레스」나 「헐크」 가 아니다. 우리는 신법에 찬 「향기 있는 한 인간」 을 원하고 있을 뿐이다.
유세장에서도 그들의 거인의식은 우리의 소망을 단번에 수척하게 한다. 도무지 단 한번도 고독에 처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그 야만한 얼굴, 당선만 되면 우리를 위해 매일 황금달걀을 낳아줄 것만 같은 철없는 발언들, 성찰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는 사나운 음성, 철학적 비유 한 마디 들을 수 없는 가난한 웅변들, 아, 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너무 달콤하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유세장의 그 소란함 속에서도 서늘한 통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신법에 찬 몇몇 입후보자들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마치 성직으로 택한 듯 경건한 결단으로 정치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정치인들에게서 사제의 향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상이다. 사제들은 그 삶이 언제나「신의 저울」 위에 놓여져 있어 비감한 중에도 부동의 아름다움을 풍기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의 신법이다. 유권자들은 언제나 정치의 모든 오류는 오직 정치인들이 책임져야한다고 분노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모든 오류는 언제나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이 함께 나눠 가져야할 반성의 몫이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우리모두는 우리의 모든 역사에 대해 철저하게 유죄하다.
선거권이란 한 능변가를 출세시켜주는 즉흥적 권리는 아니다. 선거권이란 한 그릇의 갈비탕, 한 켤레의 신발, 한 나절의 관광, 한 장의 봉투와 서슴없이 바꿀 수 있는 창백한 교환권도 아니다.
선거권이란 생명과 자유와 행복에 대한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순결한 권리 중 하나다.
산다는 것은 「선택」 한다는 것이다. 선택을 포기하는 냉소취미, 자기결단을 연기시키는 무력한 방관성,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자신의 미래를 유보시키고 질식하게 하고 그리고 침몰하게 한다.
선택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생에 대한 충분한 도전이다. 선거권이 지나치게 창조적인 얼굴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유로든 그 순결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매춘이거나 행복에 대한 자기살해다.
2월 선거와 함께 우리는 다시「이슈마엘」처럼 미지의 바다로 나간다. 수고하는 선원이 아니라 시중 받는 선장이나· 손님이 되기 위해 목청을 다해 경쟁자와 언쟁하는 입후보자들에게 루마니아의 신학자「리처드· 범브란트」 는 이렇게 방백한다.
『당신 자신이 당신 최대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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