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유승민 밀어내기' 정치사의 수치로 남을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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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새누리당은 4·13 총선의 실질적 공천이 가능한 마지막 날인 23일 밤까지 유승민 의원의 대구 동을 지역구에 공천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유승민 의원은 피를 말리는 신경전 끝에 이날 밤늦게 탈당,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국민을 이기는 권력은 없다”며 출사표를 던졌다.

새누리당이 이처럼 부끄러운 꼼수를 동원한 이유는 하나다.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박근혜 대통령의 눈밖에 난 유 의원을 밀어내기 위해서다. 우리 정치사에 큰 오점으로 남을 무리수다. 이로 인해 새누리당은 유 의원으로부터 “시대착오적인 정치보복”이란 비판을 듣는 신세가 됐다. 새누리당과 그 전신 신한국당·한나라당이 대구·경북에서 후보등록 개시 전날까지 공천을 하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전국적으로도 집권여당이 이렇게 공천을 기피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4년 전 19대 총선을 앞두고 탈당한 정태근·김성식 의원 지역구에 후보를 내지 않은 적은 있다. 하지만 이는 탈당에 명분(쇄신)이 있었고, 선거 후 복당 가능성도 있어 나온 결정이었다. 여론의 반응도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유 의원 스스로 탈당하지 않는 한 출마가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 외에는 아무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유 의원의 원내대표 시절 교섭단체 연설을 트집 잡지만 유 의원은 원내대표직 사퇴로 그 죗값을 치렀다. 그런데도 의원직 재도전까지 원천봉쇄하려 드니 국민의 거부감을 살 수밖에 없다. 설혹 유 의원의 정체성에 정말로 문제가 있었다면 공천관리위원회가 애초에 컷오프 결정을 내렸어야 한다.

그러나 공천위는 ‘폭탄 돌리기’ 하듯 시간만 끌다 유 의원이 새누리당원 자격으로 공천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날까지 넘기며 24일 공천 논의를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형식상 유 의원을 컷오프시키지 않으면서도 제 발로 당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꼼수를 쓴 것이다. 공천위는 “유 의원이 공천 여부를 결정하지도 않았는데 자진해 탈당했다”며 ‘면피’를 주장할지 모르나 이에 동의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공당의 의무인 공천을 포기하고 현역 의원을 쫓아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유 의원은 3선 중진이지만 이 정도의 전국구 스타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런 그가 순식간에 여권의 차기 대권 주자 후보까지 넘보게 된 것은 지독한 정치보복의 피해자라는 이미지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 의원이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헌법 1조2항)”며 “정의와 원칙을 위해 무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주장할 명분까지 생겨났다. 이런 상황은 공천을 주도한 이한구 공천위원장과 친박계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유 의원의 탈당에 이어 컷오프당한 친유승민계 의원들이 무소속 연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미 새누리당은 텃밭인 대구, 서울 강남에서 ‘진박’ 후보들이 경선에서 줄줄이 탈락한 바 있다. 새누리당이 ‘박심’ 아닌 ‘민심’을 기준으로 궤도를 수정하지 않으면 4월 13일 유권자들로부터 가혹한 심판을 받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