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냉전의 마지막 잔재 묻으려 쿠바에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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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간) 쿠바 국민을 향한 TV 연설에서 “냉전의 마지막 잔재를 묻기 위해 쿠바에 왔다”고 밝혔다. 아바나의 국립 대극장에서 진행된 오바마 대통령의 TV 연설은 쿠바 국영방송을 통해 생중계됐다. 앞서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은 “이번 연설은 오바마 대통령이 쿠바 국민을 직접 접하는 중요한 기회”라고 설명했다.

“금수조치 해제할 때” 밝혀 박수받아
“시민은 두려움없이 말할 권리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아바나는 플로리다에서 90 마일(약 145㎞)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이곳에 오기 위해 역사와 이념의 장벽, 고통과 분리의 장벽이라는 먼 거리를 여행해야 했다”며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며 과거의 이념적 갈등을 뒤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정부의 대쿠바 금수조치에 대해서도 “쿠바 국민을 돕는 대신 해를 줬다”며 “금수조치를 해제할 때”라고 밝혀 박수를 받았다. 금수조치 해제는 미국 공화당이 반대하면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밝혔듯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를 껴안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시민들은 두려움 없이 말할 권리가 있다”고 밝혀 쿠바 국민을 상대로 민주주의 진전의 필요성을 직접 역설했다.

21일 오바마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함께 연 정상회담 기자회견에선 양국관계의 숙제인 인권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오바마 대통령이 정치범 등 쿠바 인권 문제를 거론하자 카스트로 의장은 쿠바의 무상의료·교육을 들어 그렇지 못한 ‘미국 인권’을 우회 비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정상회담에서 카스트로 의장과 민주주의와 인권을 놓고 솔직하게 논의했다”며 “미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목소리를 계속 높여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카스트로 의장은 “건강·교육·사회보장·(남녀)동일임금·아동인권을 보장하지 못하는 정부는 상상할 수도 없다”며 “인권을 놓고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이중 기준을 적용하는 데 반대한다”고 밝혔다. 쿠바는 무상건강보험·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카스트로 의장은 쿠바 이민 2세인 CNN의 짐 아코스타 기자가 “쿠바에 왜 정치범이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정치범이 있다면 명단을 달라. 당신이 내게 주면 오늘 밤 안에 석방시키겠다”며 정치범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반면 회견 직후 로즈 부보좌관은 “관련 업무를 맡은 2년 반 동안 쿠바 정부와 수차례 정치범 명단을 공유했다”고 반박했다. 쿠바계 미국인 단체인 전미쿠바인재단(CANF)은 곧바로 투옥 정치범 41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생중계로 기자회견을 지켜본 쿠바 국민은 충격을 받았다고 미국의 공영라디오방송이 전했다. 카스트로 의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자체가 쿠바에선 전례가 드문 데다 공격적 질문까지 등장했기 때문이다.

카스트로 의장은 “미국의 대쿠바 금수조치와 관타나모 해군기지가 관계 정상화의 장애물”이라며 “봉쇄정책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비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의회가 금수조치를 얼마나 빨리 해제할지는 쿠바 정부가 인권 문제에 어떻게 나서는가에 달려 있다”고 연결시켰다. 관타나모 기지의 경우 쿠바로의 반환은커녕 기지 내 테러범 수용소를 폐쇄해 미국 내로 옮기는 것조차 상·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이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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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 말미엔 어색한 장면도 등장했다. 카스트로 의장은 양국관계의 밝은 미래를 보여 주려는 듯 오바마 대통령의 왼쪽 팔을 들어 올렸는데 팔목이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AFP통신은 “카스트로 의장이 (오바마 대통령의 손을 들어 올려) 승리를 보려 주려다 실패했다”며 “좌파의 상징인 움켜쥔 주먹 대신 오바마 대통령은 흐느적거리는 손목을 선택했다”고 평했다. NPR은 “레슬링 심판(카스트로 의장)이 경기의 승자(오바마 대통령)를 발표하는 장면 같았다”고 묘사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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