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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이공계 ‘영어 울렁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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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서울대 공대 건설환경공학부 4학년에 재학 중인 A씨는 2년 전 영어로 진행되는 공학수학 강의를 듣던 도중 강의실 문을 열고 슬그머니 나왔다. 수업 내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영어로 하는 공학수학 듣다 이해 안 돼 포기
군복무 대체요원 63% 탈락도 영어가 한몫

그 길로 수강을 포기했다. A씨는 “당시 기본 수업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내 상황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최대한 뒤로 미뤘던 이 강의를 이번 학기에 재도전했지만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정한 그에게 영어는 ‘피할 수 없는 산’이 됐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공인 영어성적인 TEPS 점수가 600점을 넘어야 하는데 그 점수가 좀체 나오지 않아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A씨는 “학과 공부나 대학원 준비는 제쳐 두고 영어 공부에 매달리고 있는 최근 내 모습이 안쓰럽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작지 않다”고 말했다.

과학 분야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 서울대 이공계가 ‘영어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다. 한 공대 교수는 “입시에 지장이 없어 중학교 이후로 아예 영어 공부에서 손을 뗀 학생이 많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했다. 이공계생들의 학내 영어수업반 배치현황은 이런 상황을 여실히 보여 준다.

서울대는 입학 때 TEPS 점수에 따라 재학생들에게 교양영어 과목을 배정한다. 올해 개설된 ‘기초영어’엔 550점 이하의 학생 400여 명이 몰렸다. 이 중 이공계생 비율은 50%에 달한다. 서울대에서 7년간 대학영어 강의를 한 강사 이모씨는 “이공계생들이 기초 영어나 작문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아 놀랐다”고 말했다.

영어는 전공 공부, 대학원 진학, 군복무 대체 등 곳곳에서 이공계생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교과서와 수업 자료가 원서인 경우가 많고 졸업 논문도 영어로 작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원 진학 후에도 해외 학회 등에 참석하려면 영어 발표 능력이 좋아야 한다. 산업공학과 대학원 3년차 B씨는 “학회 발표 자료를 작성할 때면 영어 관용어구가 정리된 웹사이트를 이용해 베껴 쓴 뒤 해외파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이공계생들의 ‘전문연구요원’ 합격에도 영어는 걸림돌이다. 전문연구요원은 3년 동안 박사 과정을 이수하며 군복무를 대체하는 제도다. 전문요원 합격을 위해선 700점 이상의 TEPS 점수가 필수다. 지난해 서울대 이공계생 691명이 이 제도에 지원했지만 63%가 탈락했다. 전기정보공학부 대학원에서 석·박사 통합 과정을 밟고 있는 정모(26)씨는 “전문연구요원 합격을 위해 아예 휴학을 하며 영어학원에 다니거나 연구에 집중하지 못하고 때늦은 영어 공부에 시달리는 대학원생이 많다”고 말했다.

최근 인공지능(AI)·드론·가상현실(VR) 등 과학 분야에서 전 세계적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영어의 벽에 막힌 서울대 이공계의 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서울대 관계자는 “최근 서울대는 연구 성과를 놓고 국내가 아닌 해외 명문 대학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고 노벨상 수상자급 석학들을 초빙해 강좌를 맡기는 것도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한 것”이라며 “이공계 학생들이 가장 기본이 되는 영어 때문에 고전한다는 건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서울대 공대 안경현 교무부학장은 “영어 논문 작성 특강을 확대하고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해외 견문 기회를 늘리는 등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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