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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경찰서 한달동안 "쉬쉬"|독극물협박사건|취재기자 방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국내 손꼽는 식품업체에 대한 독극물 투입협박사건은 해당기업은 물론 식품의 소비자인 전국민을 불안에 몰아넣고 있읍니다. 협박을 당한 회사가 당초의 3개사에서 4개사로 더 늘어나면서 충격도 그만큼 커지고 있어요. 무엇보다 사건이 근 한달만에야 공개된데 시민들의 의아심이 많은 것 같은데 그동안 취재에 얽힌 뒷얘기를 털어 놓아보죠.
-솔직이 말해서 이번 사건은 사건발생후 10여일이 지나도록 언론의 취재망에 포착이 되지 않았어요. 그만큼 경찰·해당기업의 보안이 철저, 완벽했던 셈이지만 반대로 「숨겨진 사건」을 캐내는 것이 본업인 기자들의 입장으로선 체면을 손상한 셈입니다.
-이번 사건은 중앙일보의 부분특종이었습니다. 사건발생 10여일만인 지난 월초에 독자의 제보가 있었어요. 그러나 경찰·해당기업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 「전혀 사실무근」이란 오리발이었읍니다. 확인이 안돼요. 그러던 중 범인으로부터 각 언론사에 경고문이 날아들고 모방송국엔 범인이 직접 전화를 걸어 「××식품에 독극물을 투입했으니 국민들에게 알려 조심토록 하라」는 친절(?)한 제보를 해오기도 했어요. 아니땐 굴뚝의 연기는 아니라는 감이 잡혔어요.
-그래도 경찰과 해당업체는 끄덕없이 오리발이었읍니다. 그런 일이 절대 없다는거죠. 범인이 경고하는 범죄의 실행도 그때까진 없는 상태였구요. 만의 하나 장난일지도 모르는 범인의 경고만을 믿고 이를 기사화하는 것은 어려웠어요.
-사건의 윤곽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이 지난 22일입니다.
잠실 구멍가게에서 정말로 이물질이 투입된 과자가 발견되면서 제조회사인 A제과가 협박을 당하고 있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하게 됐어요. 이틀뒤인 24일 중앙일보3판(지방배달판)에 A제과건만 보도를 했지요.
-그러나 사건을 보도하면서 정작 해당기업의 이름을 A사·B사·C사식으로 한 것때문에 시민들의 항의전화가 빗발쳤읍니다. 어떤 회사인지 똑똑히 알아야 할 것 아니냐는 거죠.
-어떤 독자는 기업의 이익이 시민의 생명보다 중하다는 얘기냐고 항의하더군요. 이름을 안 밝힐바엔 보도는 왜 하느냐고도 해요.
-충분히 이해가 가는 항의입니다. 신문사안에서도 명단공개·비공개양론이 맞섰어요. 해당업체가 입을 타격, 나아가서는 국민경제전반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신중론과 명단을 공개해 만일의 예상되는 피해를 막고 다른 업체에 미치는 피해를 줄여야 한다는 공개론이 맞선 끝에 아직 인명피해가 없다는 점에서 일단 비공개로 낙찰, 익명보도가 됐읍니다만 어차피 공개가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이번 사건의 전과정에서 기업·경찰 최대의 관심은 범인을 잡는 것보다 사건의 보도를 막는 것이었다는 인상이었읍니다.
경찰은 지난해 12월28일 C회사로부터 신고를 받아 수사에 착수하면서 3개사사장들을 불러 「3개회사가 각 언론사에 공동로비로해 무슨 일이 있어도 보도가 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침을 주었다고 해요. 그러나 3사의 이해가 서로 달라 공동보조의 로비활동은 불가능했다는 뒷얘기입니다.
-서울시경의 한 간부는 사건이 처음 보도된 뒤 『드디어 터졌구나』며 오히려 후련한 표정이었어요. 그동안 사건을 부둥켜안고 있으며 기자들의 취재에 계속 거짓말을 하는라 고통스러웠다는 것이지요.
-경찰은 사건이 처음 보도된 뒤에도 사건개요나 수사상황을 명확히 공개하기 보다는 기사 지면의 크기에만 유난히 신정을 쓰는 눈치였어요. 경찰이 끝내 범인의 협박편지를 공개하지 않은 것도 협박편지를 공개할 경우 기사가 크게 나갈 것으로 우려한 때문이지요.
-기업측의 은폐작전도 완벽했읍니다. B회사의 홍보담당이사인 L모씨는 경찰관을 앞세워 들이닥친 취재진들에게 『회사의 이사인 나로서도 금시초문』이라며 『무슨 내용이냐』고 되묻더군요.
취재진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언론사에서 취재해 왔고 범인들의 경고문발송과 전화 등으로 내용을 익히 알고 있으며 은행입금사실도 해당은행을 통해 이미 파악돼 있다』고 차근차근 설득(?)하자 L이사는 『다시 한번 알아보겠다』고 나간 뒤 30여분후에 들어와 『저도 모르는 사실이 있긴 있었던 모양』이라며 이 회사 다른 이사를 배석시켜 사건의 내용을 「일부」 밝혔읍니다.
-업체에서 가장 두려워 한 것은 무엇보다 『우리 업체가 범인과 소비자들의 표적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읍니다.
모회사 간부는 『이번 사건이 사실상 식품회사전체에 관련돼 있는데 자칫 잘못 대처하게되면 우리회사만 대표적으로 큰 피해를 보게될 우려가 있어 뚜렷한 대비책도 마련하지 못한채 전전긍긍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하더군요.
-이번 사건의 경찰수사는 이처럼 출발부터 잘못돼 한달 가까이 허송세월만 하고 잡을수 있는 범인을 세 번씩이나 놓친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사건을 은폐하는 데만 급급한데서 모든 실수가 비롯됐다고 봅니다. 경찰은 3개식품회사를 관할하는 종로·영등포. 용산경찰서에 전담반을 편성해 극비리에 수사를 했다지만 허점 투성이었어요.
-범인이 제일은행 본점과 부평지점에 나타나 협박금 인출을 시도했을때 붙잡지 못한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읍니다. 경찰은 은행측에 대해 지급거절과 함께 「인출자 신고」를 하도록 의뢰해 놓았을뿐 구체적인 사건내용이나 검거요령 등은 주지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범인이 은행에 나타났던 때는 연말연초여서 은행에 청원경찰과 함께 경찰관까지 배치돼 있었는데도 범인을 그대로 놓친 것인데 경찰은 은행의 협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오히려 은행측을 섭섭하게 생각하더군요.
-은행도 각 지점에 지급정지사실만 알리고 사건의 중요성을 통보하지 않은 과실을 저질렀고 경찰 역시 손바닥안에 들어온 범인을 공조수사체제 미확립으로 놓친 셈이지요.
-경찰은 그동안 뭘했는지 범인의 필적감정과 몽타지 작성·이물질 성분감정 등을 미뤄오다가 신문보도가 나간 뒤에야 법석을 떨었어요.
-검찰은 검찰대로 이번 사건에 경찰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당했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사법수사지휘체계가 엉망이라는 또 다른 측면에서 중대한 문제점으로 부각되고 있읍니다.
-이번 사건은 28일동안 경찰에서만 쥐고 있었어요.
-강력사건은 발생단계부터 전담검사가 현장지휘하겠다고 누누이 강조해온 검찰로선 허수아비꼴이 된 셈이죠.
-일부검사들은 경찰의 직무유기를 문제삼아야 한다고 분개하고 있어요. 경찰이 보고를 않고 그동안 검사의 수사지휘를 받지 않았으니 엄격한 의미에서 아무런 수사를 하지 않았거나 수사를 했다면 검사자격사칭에 해당될 수도 있다고 흥분하더군요.
-이 사건은 국민전체의 건강과 국가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기사를 취급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뒤로는 자기 혼자만 살겠다고 돈을 입금한 기업측의 태도도 반성할 점이 많습니다.
-아무쪼록 아무런 피해없이 범인들이 잡히기를 고대합니다. 업계·시민들의 슬기와 협조가 무엇보다 필요할것 같습니다.

<참석자>
한천수기자 허남진기자 도성진기자 고도원기자 김일기자 이덕영기자 신성호기자 저연갑기자 이상언기자 최천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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