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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권석천의 시시각각

막 내주면 안 되지 말입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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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권석천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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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
논설위원

“까똑.” 이박님이 권OO님, 김변님을 초대하였습니다.

이박 어떻게들 지내시나 궁금해서^^
권OO 난 어제 극장 가서 ‘동주’ 봤어. 뭉클하더군. 특히 끝 부분에 나오는 장면이…. 일본 형사가 취조실에서 윤동주·송몽규에게 “합법적 절차이니 서명하라”고 조서를 들이밀지. 두 사람은 말해. 당신은 열등감과 비열한 욕망을 가리려고 절차에 기대는 거라고.

김변 지금도 “규정과 절차에 따라 조사한다”고들 하지. 문제는 절차 밟았다고 해서 모든 걸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 그 절차가 실제 어떻게 쓰였는지가 중요하지. 지난주 대법원에서 나온 네이버 판결도 마찬가지고.

이박 네이버 판결? 무슨 내용이지?

김변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선수단 귀국했을 때 유인촌 장관이 김연아 선수 어깨를 두드리자 김 선수가 피하는 듯한 장면을 편집한 사진 있잖아. ‘회피 연아’라고.

김변 인터넷에 그 사진 올린 사람들이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했거든. 경찰은 영장 없이 네이버에 요구해서 ID와 이름, 주민번호, e메일 주소, 휴대전화 번호 등을 받아냈고…이후에 고소는 취하됐는데, 경찰 조사 받았던 사람이 네이버 상대로 “개인정보 제공은 위법”이라고 손해배상 소송을 낸 거지.

이박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김변 1심은 네이버 손을 들어줬는데 2심에선 5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어. 급박하게 제공해야 할 특별한 사정도 없는데 수사기관에 이용자 인적사항 일체를 준 것은 개인정보를 충실히 보호해야 할 의무를 지키지 않은 거라고.

권OO 법 조항은 어떻게 돼 있지?

김변 찾아볼게. 구 전기통신사업법 54조 3항. ‘사업자는 재판, 수사, 형 집행, 또는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를 방지하기 위한 정보 수집을 위하여…자료 열람이나 제출을 요청받은 때에는 이에 응할 수 있다’.

이박 응할 수 있다니까, 내주지 않아도 된다는 뜻 같은데, 대법원 판결은?

김변 사업자는 자료 제공 여부를 심사할 의무가 없고, 제한되는 사익도 인적 사항에 한정된다. 수사기관이 형식적·절차적 요건을 갖춰서 달라고 요청하면 원칙적으로 응하는 게 맞다. 고로, 네이버는 배상 책임이 없다.

권OO 그러니까 통신 내용은 법원 영장 받더라도 인적 사항 정도는 영장 없이 내줘도 된다는 것이군. 대법원 판결 직후에 네이버가 ‘사회적 합의가 있을 때까지 영장 없는 자료 제공 요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김변 이용자들이 동요할까 봐 그런 거겠지. 포털들은 2012년 2심 판결 뒤부터 영장 없는 자료 제공을 중단했거든. 통신사들은 계속 주고 있지만…. 이 기사 보라고. ‘국정원·검찰·경찰 등, 5년간 통신자료 1억7000만 건 봤다.’

이박 네이버가 버틸 수 있을까? 수사기관에선 “사건들도 많고 신속한 수사가 필요한데 어떻게 일일이 영장 청구하느냐”고 할 테고….

김변 지금까지 3년 넘게 제공 중단됐어도 수사 잘 해 왔잖아. 이OO과 통신한 200명 인적 사항 다 내놔, 이건 좀 곤란하잖아. 주민번호 하나만 있으면 거의 모든 걸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에…. 혐의 있으면 영장 청구하면 되고. 대법원 판결도 사기업에 배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거야. 무조건 제공하라는 얘긴 아니라고.

권OO 걱정이야. 테러방지법에도 위험 인물에 대한 개인정보, 위치정보를 ‘요구할 수 있다’고 돼 있어. 요즘 통신사들에 자료 제공 확인해 달라는 가입자 요청이 쇄도한다며? 그만큼 프라이버시 문제에 민감해지고 있는데….

이박 어떻게 국내 IT 산업 죽이는 얘기뿐이냐고. 알파고 보라고. 천문학적인 데이터 입력하면 스스로 학습하고 진화하잖아. 우선은 마케팅이나 광고에 쓰일 거 아니냐고. 인공지능이 우리의 1분, 1초를 추적하고 분석한다? 그 결과를 당사자 동의 없이 활용한다? 그 자료가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 넘어간다?

김변 어쩌면 알파고보다 그게 더 소름 끼치는 상황이지. ‘태양의 후예’ 송중기 말투를 빌리면 “막 내주면 안 되지 말입니다!”

권OO 결국 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사이버) 망명을 해야지 말입니다”란 말이 더이상 나오지 않으려면…. 아, 마감시간이다. 남은 얘긴 나중에 하기로. 그럼, 저는 이만~.

권OO님이 나갔습니다.

권석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