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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룸’이 마음을 울리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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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남짓한 작은 창고. 이곳에 한 남자에게 감금된 여성이 다섯 살 아들과 7년째 살고 있다. 아이는 태어나 바깥세상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영화 ‘룸’(원제 Room, 3월 3일 개봉,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이야기다. 2008년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감금 사건을 모티브 삼은 동명 소설을 영화화했다.

작은 방, 절망의 바닥에서 놓지 않은 한 줄기 빛

놀라운 건 이 영화가 끔찍한 사건을 통해 사랑과 희망을 담아낸 점이다.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곳에서 발견한 밝고 아름다운 사랑의 힘. 원작 소설과 시나리오를 쓴 여성 작가 엠마 도노휴(46)와 섬세한 영상 감각을 선보인 레니 에이브러햄슨(49) 감독이 합심해 포착한 주제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각색상 후보에 오르고 엄마 조이를 연기한 브리 라슨(27)은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룸’이 관객의 마음을 울린 이유를 극 중 잭의 여정을 따라 살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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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룸` 스틸컷]

1 첫 번째 방, 사랑으로 만든 무한한 우주
방에서 엄마와 둘이 사는 잭은 제법 행복해 보인다. 시간 맞춰 사이좋게 식사하고, 이를 닦고, 스트레칭도 하는 하루하루. 시간은 무료하게 흐르지 않는다. 달걀 껍데기를 실로 이어 달걀뱀을 만들고, 상상 속에서 키우는 강아지 러키와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가장 재미있는 건 엄마와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 『몬테크리스토 백작』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잭에게 방은 신나는 공상으로 매일 다른 세상을 만드는 동화 같은 나라다.

이 모든 건 감금당한 현실을 이겨내려는 눈물겨운 조이의 노력으로 이뤄졌다. 아들을 향한 애정으로 상상의 세계를 함께 만드는 조이. 그는 희망을 놓지 않는 의지의 결정체처럼 보인다. 가디언은 “인간의 의지가 눈앞에 실재하는 장애를 어떻게 초월하는지에 집중한다”고 평했다. 도노휴는 소설을 집필할 때부터 이 점을 염두에 뒀다. 실제 사건은 더 참혹했다. 아버지에 의해 한 여자가 24년간 감금당했고, 그곳에서 무려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다. 이 사건에서 도노휴가 눈여겨본 건 모성애와 생존 본능 그리고 회복력이었다. 에이브러햄슨 감독 역시 “나 역시 부모로서, 또 한때 어린아이였던 사람으로서 본능적으로 그 점에 끌렸다”고 말했다.

카메라는 공간을 분절해 방 안의 일상을 담아낸다. 마치 감옥처럼 좁은 방이 잭의 눈에는 매 순간 새롭고 다양하게 보인다는 듯이. 참담한 현실이라도 사랑이 있다면 아름답게 보이고,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자유롭게 상상한다면 아이는 어두운 곳에서도 웃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대목이다. “에이브러햄슨 감독은 관객을 무서운 밀실에 밀어 넣을 필요가 없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방을 카메라가 살펴야 하는 소우주로 보고 있었다. 엄마가 위험하다고 느끼는 방에 잭을 향한 사랑도, 안전한 우주도 공존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것이다.” 감독과 함께 작업한 도노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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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룸` 스틸컷]

2 진짜 세상을 향한 대탈주
“이 세상엔 ‘룸’이 있고 ‘룸’ 밖엔 우주와 TV 별나라가 있어요. TV 속에 있는 건 가짜, 하지만 엄마와 난 진짜예요.” 엄마와 잭의 상상으로 채운 세계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건 잭이 ‘진짜’와 ‘가짜’를 명확히 구별하면서부터다. 이제 잭은 엄마와 자신, 방 안의 익숙한 물건 외에 ‘진짜’ 존재를 갈구한다. 눈앞에 나타난 쥐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상상 속 강아지 러키를 실제로 키우고 싶어한다.

납치범 닉(숀 브리저스)이 방에 오면 옷장에 숨으라는 엄마의 말을 어기고, 처음으로 잠든 닉에게 다가간다. ‘진짜’가 있는 바깥세계를 향한 호기심이 커지고 있는 닉을 보며 엄마는 결심한다. 잭을 이용해 방에서 나가기로. “‘룸’을 절대 스릴러 장르로 마케팅하지 않겠다”고 감독은 말했지만, 잭이 탈출하는 5분가량의 시퀀스는 숨이 멎을 만큼 긴장감 넘친다. 마음을 졸이는 순간 영화는 파란 하늘과 노란 나뭇잎, 트럭의 진동 등 세상의 모든 것을 생애 처음으로 느끼는 잭의 감각에 집중한다. 몽롱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어지러울 만큼 강렬하고 아름다운 잭의 세상을 관객이 함께 느끼도록 이끈다. “어떤 눈속임도 쓰지 않았다. 잭과 엄마가 위태롭게 느끼는 순간을 예민한 감성으로 추적하려 했다.

어리고 순수한 세계에서 위험하고 불확실한 어른의 세계로 이동하는 찰나를 대사 없는 강렬한 영상의 흐름으로 그리고 싶었다.” 감독의 말이다. 극 중 가장 위험한 순간, 잭이 느끼는 생의 아름다운 감각을 “기발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포착한 건 ‘룸’을 가장 영화답게 만든 시도로 꼽힌다.”(토탈 필름) 잭의 탈주 장면이 마음을 울리는 건, 드디어 두 모자(母子)가 긴 불행에서 벗어나서만은 아니다. 오로지 엄마를 위해 무서움을 무릅쓰고 탈출을 시도한 잭의 용기 덕분이다. 영화는 엄마를 향한 지극한 사랑과 믿음이 이를 가능케 했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에 세상과 첫 대면하는 잭의 두렵고 설레는 마음을 완벽하게 표현한 제이콥 트렘블레이의 연기가 감동을 배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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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룸` 스틸컷]

3 세상의 편견이라는 또 다른 방
해피엔딩으로 보인 이야기는 탈출에서 끝나지 않았다. 7년 동안 감금당하고 기적적으로 탈출한 둘의 사연은 빠른 속도로 미디어에 공개된다. 사람들은 둘을 신기하고 불쌍하다는 듯 바라본다. 시선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플라스틱처럼 유연한 나이’인 잭보다 그의 엄마인 조이다. 조이를 연기한 브리 라슨은 촬영에 앞서 그의 심정을 이해하려 청소년 트라우마를 연구한 전문가와 정신의학 박사에게 상담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뇌는 생존을 위해 자신의 일부를 단절할 수 있다. 방 안에서 조이는 살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잭에게 최고의 엄마가 되려 한다. 그러다 집에 돌아오자 모든 게 돌아온다. 몸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억압해 온 모든 기억이 쏟아지는 것이다. 삶의 아이러니다.”

그뿐만 아니라 납치범의 아이를 낳고 길렀다는 가시 돋친 세상의 시선은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낸다. 닉에 의해 감금당했던 방에서 나오자, 세상의 편견과 트라우마라는 또 다른 방에 갇힌 것이다. 잭과 엄마만의 특별한 사연처럼 보인 이야기는 어느덧 보편적 울림을 선사한다. 세상이 준 상처와 두려움이라는 그녀의 두 번째 시련은 또다시 잭의 사랑으로 치유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잭과 엄마는 함께 살았던 방에 찾아간다. 이젠 텅 빈 창고일 뿐이다. “문이 열려 있으면 룸이 아니야”라는 잭의 말은, 하나의 시련을 극복하면 그건 더 이상 대단한 장애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러니까 엄마도 이제 괜찮다고. 손을 꼭 붙잡고 돌아가는 두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는 다시 힘줘 말한다. 절망이라는 닫힌 방을 열어젖힐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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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룸` 표지]

아이의 시선으로 그린 원작 소설 『룸』
아일랜드 출신 작가 엠마 도노휴가 쓴 소설 『룸』은 2010년 9월 발표되자마자 평단과 대중의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인터넷 서점 아마존에서 36주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그해 뉴욕타임즈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됐다. 문학평론가인 부모 사이에 태어나 케임브리지대에서 문학을 전공(박사)한 그는 스물세 살부터 소설가로 활동해 왔다.

『룸』은 잭의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아이가 쓸 법한 단순한 문장으로 엄마와 잭의 심리 상태, 위급한 상황을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낸다. 도노휴는 자신의 소설이 언젠가 영화가 될 것이라 생각해, 소설 집필을 끝내자마자 홀로 영화 각색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원작자가 영화 각색을 맡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는 “소설에선 잭의 목소리가 독자를 천천히 매료시켰지만, 영화는 엄마와 잭의 삶에 빠르게 몰입할 수 있도록 각색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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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룸` 스틸 이미지]

세상과 단절된 그 방을 만들기까지
가로 3.5m, 세로 3.5m. 극 중 엄마와 잭이 갇혔던 방은 화장실·주방·침실이 구분되지 않는 좁은 원룸 형태다. 제작진이 가장 고심한 건 관객이 믿을 만큼 현실적으로 보이되, 동화적 느낌이 묻어나는 방을 만드는 것이었다. 엄마에겐 감옥 같은 방이지만, 잭에게는 놀이와 즐거움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이다. 미술감독 에딘 톱만은 일단 교도소와 홀로코스트 공간, 오스트리아 사건 당사자가 실제 실제 감금됐던 장소 등 모든 종류의 감금 시설을 연구했다. 그는 “갇힌 이들은 대부분 공간을 제각각 다른 방식으로 의인화했음을 깨달았다”며 “잭에게 방은 전기 콘센트마저 장난감이 될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석했다”고 말했다. 그는 극 중 납치범 닉이 궁핍했다는 설정을 감안해 저렴한 조립식 타일을 내장 재료로 활용했다. 7년의 흔적이 나타나는 빛바랜 벽을 만들기 위해 벽을 변색시키고 먼지 묻히는 등 사실적 묘사에 공을 들였다.

한편 동화 같은 느낌을 주기 위해 여러 소품을 활용했다. 침대 머리맡에 붙어 있는 그림들이 그중 하나다. “엄마는 아들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싶어 그를 그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은 조이와 잭의 사랑이 느껴지는 아늑함을 선사한다. 또 잭에게 방은 매 순간 새롭게 보이기 때문에 공간을 나누어 각 부분을 개별적 세계로 만들었다. 톱만은 “벽장이나 욕조도 하나의 행성처럼 만들었고, 빛이 들어오는 천정의 채광창도 살아 있는 캐릭터처럼 보이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 결과 극 중 방은 영화의 어둡고 신비로운 정서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절망과 희망이,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곳으로 탄생한 것이다.

김나현 기자 respir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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