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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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고인도 나 못 보고 나도 고인 못 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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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전 기획예산처 장관

고인을 못 뵈도 예던 길 앞에 있네

예던 길 앞에 있거든 아니 예고 어쩌리

- 퇴계 이황(1501~70) ‘도산십이곡’ 중 9곡

500년 전 퇴계가 가려 했던 길
지금도 내가 응당 가야 할 길

퇴계(退溪)의 우리말 연시조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중 한 수이다. ‘도산십이곡’ 전체의 주제는 자연에 사는 즐거움과 학문을 하는 기쁨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이 시는 고인, 즉 옛 성현은 비록 돌아가셔서 뵐 수 없으나 그의 학문과 덕행에 힘쓰던 길을 알 수 있으니 반드시 따르겠다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는 퇴계 자신의 온고지신(溫故知新) 다짐이자 사람들에게 하는 권유이기도 하다.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8년 전 퇴계의 고향, 경북 안동 도산에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일로 머물게 되면서였다. 그 당시 나는 퇴계가 성현의 말씀이 담긴 경전 공부를 하면서 응당 그런 마음을 갖게 됐고, 그래서 주위와 공유하려 지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날수록 이 시조가 가족, 친지들과 떨어져 객지인 이곳에 머무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그대로 일러주는 듯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퇴계가 밟던 땅을 거닐며 매일 이 시조를 외운다. 퇴계의 걸어간 삶(예던 길)을 접할수록 존경스럽게 느껴지니 머물지 않을 수 없다. 찾아오는 수련생들에게 안내도 하고, 찾아오지 않는 이들에게는 책·칼럼 등을 통해 그 길을 권유하는 것이 국가의 은혜를 크게 입은 필자의 임무이기도 하다.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전 기획예산처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