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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달의 상징 ‘푸얼다이’서 기업 혁신 주도 ‘촹얼다이’로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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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호 7 면

‘배운 것도 재주도 없는(不學無術) 건달’.


중국인들은 자국의 ‘푸얼다이(富二代)’, 즉 재벌 2세를 이렇게 부른다. 사치에 빠지거나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고 종일 술집 혹은 해외 카지노에서 죽치는 이들이 많아서다. 그들이 요즘 정신을 바짝 차리고 기업의 혁신을 주도하는 촹얼다이(創二代)로 변신하고 있다. 중국 경제가 고성장에서 중·저성장시대로 접어든 데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주도하고 있는 반부패와 개혁 폭풍까지 몰아치면서 생겨난 변화다. 과거처럼 건달짓 했다가는 패가망신하기 딱 좋은 상황임을 알아차린 거다. 중국공상연맹연구실이 최근 내놓은 중국 가족기업 발전보고에 따르면 향후 5~10년 약 300만 개의 중국 가족기업에서 경영권 승계작업이 이뤄질 전망이다.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창업해 성공한 1세대들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푸얼다이들이 중국 기업의 핵심으로 부상하고 있다는 얘기다.


푸얼다이들의 변신은 대략 세 가지 유형을 보인다. 첫째, 배수진(背水陣)파다. “경영에 실패하면 경영권을 포기하겠다”며 자신을 벼랑 끝으로 몰고 기업 혁신에 올인하는 것이다. 자오닝(趙寧·28) 베이징지메이(北京集美) 국제주업(國際酒業) 총재가 대표적이다. 포도주 유통업체를 경영하는 그는 지메이(集美)가구 그룹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자오젠궈(趙建國·62)의 아들이다.


가구 사업으로 회사 발전의 한계를 느낀 자오 회장은 2009년 포도주의 온라인 유통에서 도약의 돌파구를 찾기로 했다. 그는 자오닝을 불러 포도주 사업의 미래를 설명하고 도전을 주문하면서 “9000만 위안(약 168억원)을 투자하겠다”고 했다.


매일 호화 외제 차로 살던 그에게 사업은 쉽지 않았다. 포도주 온라인 유통 경쟁이 심한 데다 2013년 시 주석 취임 이후 사치풍조 근절을 핵심으로 하는 ‘8항(八項) 규정’까지 겹쳐 포도주 소비량이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2013년 한 해에만 국제주업은 1300만 위안(약 24억원)의 손실을 봤다. 아버지의 불신이 커지자 자오닝은 “만약 아버지의 투자금을 날리거나 회사가 파산할 경우 지메이가구 그룹의 경영 승계를 포기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이후 그는 현장에서 살았다. 수입 포도주의 유통 과정을 면밀히 조사하고 유럽 산지를 돌아봤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유럽에서 3유로(약 4000원)인 포도주가 중국 온라인에서 300위안(약 5만6000원)에 팔리고 있었다. 그는 온라인 중간 유통을 건너뛰고 산지와 직접 거래하는 방식으로 포도주의 가격을 300위안에서 70위안 아래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가격이 낮아지자 사치품이라는 이미지도 덩달아 사라지며 매출이 올랐다. 지난해 300만 위안의 순익을 올렸고 올해는 최소 1000만 위안의 순익을 바라보고 있다.

지난해 10월 주방용품 제조업체인 화디(華帝)의 동사장(이사장)에 오른 판예장(藩葉江·39) 역시 아버지에게 “회사를 초일류기업으로 키우지 못할 경우 경영권을 내놓겠다”는 선언을 한 후 회사를 첨단 제품 위주로 전면 개편하며 중국 주방업계 혁신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둘째는 독립파다. 돤류원(段劉文·35) 한랑광뎬(漢郞光電) 최고경영자(CEO)에게는 한 가지 사업 원칙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가족이나 지인의 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버지 잘 만나 금수저 물고 고공 행진한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다.


그의 부친은 중국의 대표적인 전자업체인 쓰퉁(四通) 집단(그룹)의 돤융지(段永基) 회장이다. 돤 회장은 베이징의 중관춘(中關村)을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발전시킨 인물로 ‘중관춘의 아버지’로 불린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돤류원은 중국 최고 병원이라는 301(군)병원의 군의관이 됐다. 그러나 군 생활은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다. 그는 군의관을 그만두고 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8년 귀국한 그가 창업 의사를 밝히자 아버지는 “결정도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네가 지는 것”이라며 아들의 선택을 존중했다. 이후 돤류원은 액정화면 최고 기술을 가진 쑨강(孫剛) 박사와 손잡고 한랑광뎬을 창업했다. 돤은 창업 과정에서 아버지에게는 단 한 푼도 도움을 받지 않고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설명해 50만 위안의 투자를 받았다. 이후 한랑광뎬은 전자 라벨과 스마트 의료관리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해 현재는 자산 5억 위안(약 931억원) 회사로 성장했다.


류촨즈(柳傳志·72) 레노버 회장의 딸 류칭(柳靑·38) 역시 독립파다. 레노버는 중국 최대 민영기업으로 류촨즈는 중국 정보통신(IT) 업계의 대부로 통한다. 베이징대와 하버드대를 졸업한 류칭의 사업관은 ‘죽도록 일하겠지만 아버지에게는 죽도록 신세 지지 않겠다’다. 실제로 그는 2002년 하버드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골드먼삭스에 입사해 일주일에 100~140시간씩 일했다. 그는 2012년 골드먼삭스 사상 최연소인 34세 나이에 아시아 담당 사장으로 승진했다. 지난달 중국의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인 디디(滴滴)의 총재(사장 격)로 자리를 옮겨 중국 자동차 서비스 업계의 경쟁과 혁신을 주도하고 있는데 중국 업계에선 그를 자력으로 혁신의 길을 가고 있는 대표적 기업가로 평가한다.


셋째는 실용파다. 가족 회사의 네트워크와 정보를 최대한 활용해 혁신을 추구하는 데 대부분 푸얼다이가 여기에 속한다. 아시아 최고 부자인 왕젠린(王健林·62) 완다(萬達)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왕쓰충(王思聰·28)이 대표적이다. 왕 회장은 중국 부자를 연구하는 후룬(胡潤)연구소가 지난달 발표한 ‘2016 글로벌 부자 순위’에서 총 자산 1700억 위안(약 31조5000억원)으로 부동의 아시아 최고 부자였던 리카싱(李嘉誠) 홍콩 청쿵그룹 회장을 제쳤다.


프로메테우스캐피털 대표이사인 왕쓰충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배우들과 초호화 외제 차를 타고 염문을 뿌리는가 하면 자신의 애완견에게 애플 워치를 채운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그런 그가 최근 2~3년 새 투자의 귀재로 주목받고 있다. 그는 완다 그룹 내 모든 역량을 동원해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 현장 확인 후 투자를 결행한다. 이른바 금수저 영업이다. 이런 방식으로 지난해 한국 기업 등에 투자해 8개월간 무려 3000만 달러(약 351억원)를 벌어들였다. 지난해 12월에는 직접 한국을 방문해 프로메테우스캐피털의 한국 내 시각 효과(VFX) 업체 덱스터의 코스닥시장 상장 기념식에 참석했다.


최형규 중국전문기자 chkc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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