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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특집 1] 대구, ‘포스트 박근혜’의 깃발은 누구 손에?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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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과 유승민 의원의 싸움에 대구 유권자들 당혹감 속 짜증… 김부겸 전 의원, 김문수 전 경기지사도 빅매치 통해 차기 TK의 맹주 눈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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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에서 대구 시민들은 박근혜 대선 후보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유세 중인 박 후보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 사진·중앙포토

대구의 한여름은 언제부터인가 달서구 두류공원에서 열리는 ‘치맥 페스티벌’로 절정을 이룬다. 무더위로 유명한 분지도시 대구에서 매년 7월이면 수십만 명이 모여 이곳에서 치킨과 맥주를 테마로 파티를 연다. ‘치맥 페스티벌’은 다른 지역에 견줘 먹거리가 변변치 않은 대구를 대표하는 축제로 각광을 받는다. 올해 대구 시민들에게 치킨은 색다른 의미로 와 닿을 듯하다. 박근혜 대통령과 지역의 차기 주자로 일컬어지는 유승민 새누리당 의원이 4월 총선을 앞두고 ‘치킨게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치맥 축제’ 유명한 달구벌 권력자 ‘치킨게임’에 질식할라

친박계 한 분석가와의 일문일답은 그 이유를 극명하게 설명해준다.

새누리당 유승민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전 의원 중 누구의 당선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더 큰 타격을 주는가?

“유승민 의원의 당선이 더 큰 타격이다.”

왜 그런가?

“김부겸 전 의원이 이기면 김문수 전 경기지사가 졌다는 게 되지만 유 의원이 당선되면 박근혜 대통령이 진 게 된다. 적어도 그렇게 비칠 것이다. 바로 레임덕이 온다.”

어떤 대책이라도 있나?

“글쎄, 지금 여권이 하는 걸로 봐서는 박 대통령의 권력누수를 막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분석가는 대구 총선의 관전포인트로 유 의원의 당락을 들었다. 박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라선 유 의원의 생환(生還)은 새누리당 친박계에게는 악몽 같은 일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보수의 본류라 할 대구는 원래 이변을 모르는 도시다. 웬만해서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선거도 그렇다.

2000년 16대 총선 이래 단 한 석도 진보정당이나 진보 후보에게 허용한 적이 없는 새누리당의 텃밭이다. 2008년 총선에서 박근혜 의원을 추종하는 친박연대나 친박 무소속 후보가 당선되긴 했지만 나중에 모두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에 합류했다. 2012년 대선에서는 유권자의 80%가 투표에 참여해 80%가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이른바 ‘8080’의 신화를 창조했다. 그만큼 박 대통령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4월 총선을 앞둔 이곳에 두 개의 전선(戰線)이 형성되고 있다. 하나는 새누리당 내부에서, 또 하나는 새누리당 밖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박 대통령을 따르는 친박계와 유승민 의원과 가까운 비박계 간 공천경쟁이 뜨겁다. 새누리당 밖에서는 김부겸 전 의원이 수성갑에서 새누리당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의 일대 격전을 예고한다.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김 전 의원이 대구발(發) 이변을 가져온다고 야권은 벌써부터 떠들썩하다.

감성은 이재만이고, 이성은 유승민 앞서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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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차세대 주자로 분류되는 유승민 의원이 총선에서 승리하자면 ‘현재권력’인 박근혜 대통령을 넘어서야 한다. / 사진· 중앙포토

새누리당 내 대결 구도는 ‘현재권력’과 ‘미래권력’ 중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로 압축된다. 박 대통령이 “진실한 사람을 선택해달라”며 정치적으로 갈라선 유승민 의원에 대한 비토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지역 유권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대구가 낳은 현재권력이고, 유 의원은 차기 정권 창출에 유용한 미래권력으로 인식된다. 둘 다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기에 어느 한쪽도 배척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박 대통령의 사람임을 자처하는 ‘진박(眞朴, 진실한 친박)’ 예비후보들이 유 의원과 가까운 비박계 현역 의원들과의 경쟁에서 밀리는 형국이다. 친박의 수장격인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가 대구를 돌며 ‘진박’ 후보 지지를 설파하고 있으나 비세(非勢)를 뒤집기는 벅차 보인다. TK의 차세대 주자로 분류되는 유 의원 또한 ‘진박 후보’를 자처하는 이재만 전 동구청장을 여론조사에서 더블 스코어로 앞서고 있다. 그 원인을 두고 지역 일간지 <영남일보>의 박재일 정치 에디터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 의원 등 비박계 의원들을 떨어뜨리자면 유권자들이 충분히 납득하도록 인과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런 준비와 논리가 부족한 상황에서 유권자들에게 진박 후보를 지지하라고 종용하다 보니 짜증을 유발하는 등 부작용을 낳는다.”

그럼에도 선거에 임박할수록 격차는 좁혀지리라는 게 지역 정치권의 대체적 견해다. 박 대통령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유 의원을 경선에서 주저앉히려는 친박계의 총공세가 예상된다. 박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겠지만 친박계는 어떤 식으로든 이번 싸움을 ‘박근혜 대 유승민’의 양자 대결로 몰아갈 공산이 크다.

비록 유 의원이 여론 주도층에서 일정한 지지세를 얻고 있고, 전국적 인물이라 여론전에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밑바닥 민심을 파고드는 데는 이재만 전 동구청장도 일가견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전 구청장이 저인망식 득표전에서 능력을 발휘한다면 박빙 승부로 갈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감성적으로는 이재만 후보에 쏠리면서도 이성적으로는 유 의원에게 눈길을 주는 게 대구 민심의 현주소”라는 게 박 에디터의 분석이다. 박 대통령은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대구 유권자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 외롭고 고통스러운 결정을 강요하게 될 것이라고 그는 진단했다. 예컨대 유 의원이 경선에서 이기면 박 대통령이 레임덕에 빠지게 된다는 식의 논리가 유포되면 이 지역민들의 감성은 한껏 자극될 게 자명하다. 이쯤 되면 유권자들도 감성과 이성이 분리되는 선거로 흐를 수도 있다. 그래도 지역구도 아래서 치러지는 선거는 막판 이성적 판단이 흐려지면서 표쏠림 현상으로 나타나곤 했다는 것이다.

지역 정치권 일각에서는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다른 해법이 거론되기도 한다. 유 의원이 박 대통령의 성원에 힘입어 대구 동을 지역구에서 당선(2005년)되고, 한나라당 대표 비서실장에 발탁되는 등 정치적 입지를 다진 만큼 한번쯤 통 크게 양보하는 방안이다. 박 대통령 국정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잠시 뒤로 물러나는 결단, 즉 불출마 선언을 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게 두 사람이 윈-윈 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박 대통령도 총선에서 진박 마케팅 같은 무리수를 둘 필요도 없이 남은 2년의 국정을 차분하게 마무리하게 되고 유 의원도 아량과 결단의 정치인으로 후일을 도모하리라는 그림이다. 그를 따르던 대구의 비박계 현역의원들도 지금 같은 친박계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지 않고 활로를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전국적 지명도와 콘텐트를 갖춘 유 의원은 총선 후 있을 재·보궐 선거에 차출 1순위로 자리매김할 가능성도 높다. 익명을 요구한 지역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유 의원의 원내대표 시절 옆에서 도왔다는 이른바 대구의 비박계 초선 의원들은 행위에 비해 가혹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면서 “유 의원이 결단을 내린다면 박 대통령이나 이들 초선 의원이나 한결 정치적 부담을 덜게 된다”고 전했다.

유승민이 중도탈락하면 김문수는 유리한 싸움할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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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겸 전 의원과 김문수 전 경기지사는 대구시 수성구 범어네거리의 인접한 빌딩에 선거사무소를 각각 열었다. / 사진·중앙포토

물론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이제는 박 대통령과 유 의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꺾여야 끝나는 전쟁이 됐다. 새누리당 공천 심사과정에서 유 의원이 부적격자로 분류돼 경선 참여 자체가 봉쇄되는 경우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유 의원이 우여곡절 끝에 경선 관문을 통과한다고 해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진다고 보긴 어렵다. 유 의원이 생환한다는 건 살아있는 권력인 박 대통령에게 망신살이 뻗쳤다는 말이 된다. 유 의원은 박 대통령 지지자들에게 대통령과 끝까지 맞선 협량의 정치인으로 각인될 수도 있다. 박 대통령 잔여임기 동안 유 의원은 친박계의 온갖 견제와 질시에 노출될 것이다. 당내 권력의 균형추가 자기 쪽으로 확 기울지도 않을뿐더러 내년 대선 국면에서도 운신의 폭이 극히 좁아진다. 총선을 통해 전국적 정치인으로 성장은 하겠지만 대구를 비롯한 보수 핵심 지지층의 마음을 끌어안는 데는 본질적인 한계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하세헌 경북대 정치학과 교수는 “연로하거나 보수적인 지역 유권자들은 국회의원이 대통령에게 대들어서는 안 된다는 관념을 갖고 있다”면서 “유 의원이 당선되더라도 내년 대선에 쉽게 나서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권력이 대선에 나서는 유 의원을 수수방관할 리 있을까? 결국 박 대통령과의 관계설정이 관건이다. (박 대통령의 캐릭터 등으로 볼 때) 유 의원의 대선 도전은 보다 장기적인 목표로 넘어갈 수도 있다.”

대구 총선은 또 한 명의 잠룡의 탄생을 예약했다.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수성갑에서 새누리당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더민주의 김부겸 전 의원이 맞붙는다. 이 빅매치의 승자 또한 차기 대선주자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걸로 나오는 김부겸 전 의원은 2012년 4월 총선과 2014년 대구시장 선거에 야당 후보로 나서 40%대의 높은 득표력을 과시했다. 그가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로 떠오를 전망이다. 야권의 두 잠룡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총선 결과와 무관하게 야권 분열의 당사자라는 멍에를 안게 될지도 모른다. 반면에 “김 전 의원은 지역주의 타파에 기여하고 통합의 리더십을 구현할 상징적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고 윤희웅 오피니언 라이브 여론분석센터장은 전망했다. 윤 센터장은 “대구라는 보수의 텃밭을 근거지로 하는 김 전 의원은 중도층으로 표의 확장성까지 갖춰 야권에서의 입지가 한층 강화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문수 전 지사도 경기지사 시절부터 ‘잠룡’으로 손꼽혀왔다.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도 참여했던 그는 이번 총선을 통해 대구·경북의 맹주 자리를 노린다. 만약 유승민 의원이 당내 경선에서 배제되거나 패배해 차기 주자의 대열에서 일시 이탈한다면 김 전 지사는 더 유리한 고지에서 싸움을 이끌 수도 있다. 박 대통령의 뒤를 이을 차기 주자라는 이미지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구의 4월 총선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이 뒤엉키면서 이래저래 오리무중의 국면으로 치닫는다.

박성현 기자 park.su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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