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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팀 없고 정년도 없죠…색다른 판교 벤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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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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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개발업체 블루홀의 모든 성과는 ‘160X70㎝’ 공간에서 나온다. 이 수치는 블루홀의 책상 크기다. 사장부터 인턴사원까지 440여 명 직원이 모두 같은 크기의 책상에서 일한다. 사장실, 임원실도 따로 없다.

테크노밸리의 파격 인재 구하기

그러다 보니 대표와 신입사원이 나란히 앉아 일하기도 한다. ‘모든 직원은 평등하다’는 장병규 본엔젤스파트너스 파트너(현 블루홀 이사회 의장)가 2007년 회사를 설립할 때부터 지켜온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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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회사는 인사팀도 없다. 대신 총무팀과 인사기획팀을 합쳐 ‘피플팀’을 뒀다. 말 그대로 사람, 즉 직원들을 위한 ‘민원 처리반’이다. 굵직한 복리후생 제도 개선부터 손수 손으로 쓴 생일카드 전달까지 업무 능률을 높이기 위한 모든 사내 이슈를 꼼꼼히 챙긴다.

 게임업계는 이직이 잦은 편이다. 블루홀은 퇴사하는 직원과 툭 터놓고 면담하는 ‘퇴직자 면담 제도’를 통해 직원의 퇴직을 오히려 사내 제도 개선의 기회로 이용한다. 반복해서 제기되는 문제를 경영진과 공유해 현실적인 개선안을 마련하자는 취지다.

김강석 블루홀 대표는 “2015년 입사 지원자 수가 전년 대비 40% 늘었다”며 “리니지, 아이온 같은 유명 온라인 게임을 총괄한 인재들이 대형 게임업체에서 이직하기도 하고 삼성전자, LG전자 출신 직원이 많다”고 말했다.

 온라인 게임 ‘테라’를 개발한 이 회사는 지난해 600억원 정도의 매출을 올린 중견 게임업체다. 최근 1년 동안 블루홀지노게임즈(구 지노게임즈), 피닉스게임즈, 스콜, 마우이게임즈 등의 게임 개발사를 인수해 모바일 게임에도 진출했다.

 벤처업계가 만성적인 인력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수평적인 기업 문화와 인사제도 혁신으로 인력 전쟁에서 우위를 점한 판교 테크노밸리(경기도 성남시)의 기업들이 눈에 띈다. 판교발 인사 혁신은 소규모 벤처 뿐 아니라 이곳에 본사를 두고 있는 대기업으로도 확산하고 있다.

 건설·기계 분야의 공학 시뮬레이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마이다스아이티의 지난해 입사경쟁률은 505대 1이었다. 구직자들 사이에서 ‘꿈의 직장’으로 불리는 이 회사는 이형우 대표의 ‘인본주의’ 경영에 따른 인사·복지제도로 인재들을 모으고 있다.

마이다스아이티는 승진심사를 하지 않는다. 사원으로 입사해 4년이 지날 때마다 대리, 과장, 차장, 부장으로 자동 승격된다. 6년이 더 지나면 임원이 될 수 있다.

다만 성과가 우수한 직원은 2년마다 조기 승진의 기회를 얻는다. 직원들에게 안정된 고용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다.

정년퇴직도 없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으면 60세를 넘어서도 일할 수 있다. 고용이 보장된 직원들이 현실에 안주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지만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는 열정적인 분위기”라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공채 직원을 뽑을 땐 3개월 간의 채용 과정을 거칠 정도로 공을 들인다. 스펙 보다는 열정, 전략적 사고 등이 뛰어난 인재를 채용하고, 이들에게 최상의 업무환경을 제공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방침이다.

15년 전 매출 15억원으로 출발한 마이다스아이티는 지난해 매출 750억원을 올렸고, 최근엔 가상현실(VR) 사업에도 진출했다.

 총싸움게임(FPS) ‘서든어택’으로 유명한 게임 개발사 넥슨지티는 매주 사장과 직원들이 함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는 ‘CEO 커뮤니케이션 데이’를 운영한다.

점심 시간에는 외국어 강사를 회사로 초빙해 직원들의 자기계발을 지원한다. 직원들에게 중요한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한과 개인 역량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줘, 앞으로 리더로 성장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취지다.

 기업문화 혁신 노력은 판교에 있는 일부 대기업도 도입하고 있다. 기존 대기업과는 다른 혁신 조직문화가 젊은 인재들을 잡는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올해 초 온라인 쇼핑몰 11번가를 운영하는 커머스플래닛과 합병한 SK플래닛은 경영진이 전 직원 앞에서 주요 현안과 실적을 직접 발표하는 행사를 토크쇼 형식으로 매달 연다.

자발적으로 지원한 80여 명 사내 전문가들이 점심시간에 동료 사원들 앞에서 전문지식, 성공사례 등을 공유하는 캐주얼 세미나 ‘펀치(플래닛+런치)’는 하루 만에 신청이 마감될 만큼 인기다.

 본지(2월 25일자)가 판교 테크노밸리의 최고경영자(CEO) 31명에게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벤처업계 CEO들은 인력난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복수응답 58.1%).

앞서 언급된 4개 회사들을 기업정보 사이트 잡플래닛에 의뢰한 결과 모두 ▶승진 기회 및 가능성 ▶복지 및 급여 ▶업무와 삶의 균형 ▶사내문화 ▶경영진에 대한 만족도 부문에서 5점 만점에 평균 3.3을 넘는 평가를 받았다.

연세대 신현한(경영학과) 교수는 “요즘 벤처는 직원 한 명 한 명이 창업주처럼 뛰어야 하는데 과거처럼 높은 연봉 만으로는 동기부여를 이끌어내기 어렵다”며 “인재 확보가 가장 중요해진 만큼 기업들이 승진제도와 의사결정 과정 등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최은경 기자 chin1ch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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