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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기억나니 눈부신 바다, 설렜던 우리의 첫사랑…'순정' 김소현 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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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전남 고흥의 작은 섬마을. 뭍에 나가 공부하던 범실(도경수)·산돌(연준석)·개덕(이다윗)·길자(주다영)는 방학을 맞자마자 한달음에 섬으로 돌아온다. 다리가 불편해 뭍에 나가지 못하고 홀로 마을을 지키고 있을 수옥(김소현)과 신나는 여름을 보내기 위해. 친구들은 수옥을 번갈아 업어주며 닭도 잡고 노래자랑에도 나가며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김소현|혼자 할 수 있는 게 점점 더 많아졌으면

그로부터 23년 후 서울의 한 라디오 방송으로 시작되는 ‘순정’(2월 24일 개봉, 이은희 감독)은 그해 여름, 바다처럼 싱그러웠던 다섯 친구의 우정과 가슴 시린 첫사랑의 이야기를 들춰낸다. 촬영 내내 극 중 10대 아이들처럼 장난치며 가까워졌다는 배우들. 그래서일까. 개봉을 앞두고 만난 도경수와 김소현에게선 여전히 범실과 수옥 같은 친근감이 물씬 풍겼다. “제가 오늘 피곤해 보여서 챙겨준 것 같아요.” 쑥스러워하는 김소현에게 도경수가 건넨 작은 초콜릿 상자에서 영화 밖에서도 이어지고 있는 ‘순정’ 친구들의 변함 없는 우정이 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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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순정’에 출연한 배우 황석정의 인터뷰를 읽다 멈칫했다. “(김)소현이는 사투리를 디테일하게 익히려고 동네 목욕탕까지 다니더라고요. 참 기특하죠?” 김소현(17)은 올해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 아무리 극 중 연기한 수옥이가 전라도 토박이라지만 한창 사춘기의 여배우가 대중 목욕탕이라니. ‘에이 설마…’ 하던 마음은 김소현을 만나자마자 ‘그러고도 남겠다’로 바뀌었다.

열 살 때 드라마 ‘전설의 고향’(2008, KBS2)의 귀신 들린 아이 역으로 데뷔한 뒤 벌써 9년차. “하면 할수록 연기가 새롭다”는 그는 최근 인간 김소현이 느낀 감각이 캐릭터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다섯 친구들이 허물없이 정말 가까워 보였다.
“서먹해 보일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내가 원래 오빠들과 잘 친해지지 못한다. 말 놓는 것도 어렵고 불편했는데 ‘순정’은 달랐다. 다같이 고흥에서 지내며 촬영해서인지 여행을 간 것처럼 재밌었다. 촬영 틈틈이 얘기도 정말 많이 하고. 촬영 내내 언니·오빠들이 열일곱 살 또래 친구처럼 느껴졌다(웃음).”
바다에서 헤엄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사실… 수영을 못한다. 얕은 물에 들어가는 장면을 빼면 거의 대역이다. 바다에 빠진 수옥을 범실이 구하는 장면은 직접 연기했는데 깊이 5m 수조에서 촬영했다. 드라마 ‘후아유’ 이후 두 번째인데도 부담되더라. 전문가들이 바로 옆에 있어도 깊은 바다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면 갑자기 숨이 막히고 무서워졌다. (도)경수 오빠가 있어서 조금은 안심이 됐다. 자신이 더 가라앉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먼저 물 위로 밀어줬다. 자기도 수영을 못하면서 말이다. 진짜 고마웠다.”
바다 수영이 능숙해 보여서 진짜 잘하는 줄 알았다.
“전혀 못한다. 바다 장면을 찍을 때마다 수영도 못하는 경수 오빠가 너무 재밌어 해서 신기했다(웃음).”
이은희 감독이 도경수와 촬영 내내 손 잡고 다니라고 주문했다던데.
 “첫 촬영 날만 그랬다! 수옥이 노래 경연대회에 나가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인데, 너무 어색해서 서로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다. 여름이라 땀도 나고 민망해서 슬쩍 손을 놓으려 했더니 감독님이 모니터로 다 보고 있다면서 빨리 잡으라고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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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혹독한(?) 전략이 낳은 배우들의 진심 어린 풋풋한 연기가 ‘순정’을 보는 즐거움이라면, 아쉬운 부분도 있다. 바로 엄마를 여의고 한쪽 다리가 불편한데도 늘 밝고 착하기만 한 수옥과 후반부에서 다섯 친구에게 느닷없이 닥치는 비극이다. 범실과 서로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에서도 수옥은 계속 울기만 한다.

그건 김소현이 가장 고민했던 장면이기도 하다. “좋아하는 남자애가 평생 지켜주겠다는데 웃을 수도 있지 않나 싶었어요. 감독님한테 물었더니 그러셨어요. 수옥이가 친구들한테 늘 밝은 모습만 보이려고 하는 건, 친구들이 자기를 얼마나 신경 써주는지 알기 때문이라고. 고맙고 사랑하는 만큼 더더욱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는 거라고. 그래서 수옥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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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친구들과는 어떻게 지냈나.
“지금은 홈스쿨링을 하지만 중학교 땐 다른 반 친구들과도 두루 친하게 지냈다. 점심시간마다 학교 또래 상담소에 가서 상담 선생님과 얘기도 나누고, 친구들 고민 들어주는 걸 좋아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고 다른 친구들의 삶을 간접 체험하기도 했고.”
지난해는 배우로서 전환점이 되는 해였을 것 같다. 누군가의 아역이나 딸 역할이 아닌 온전한 주연을 도맡았다. 쌍둥이 1인 2역을 한 ‘후아유’로 KBS 연기대상 신인상도 받았다.
 “생각보다 일찍 아역을 벗어나게 해준 고마운 드라마다. 급하게 합류하긴 했지만 주어진 기회를 망치고 싶지 않아 정말 열심히 했다.”
아역 시절부터 늘 동행하던 어머니 없이 혼자 촬영장에 가는 날도 곧 오겠다.
“거의 10년간 엄마가 모든 걸 챙겨주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뭘 사러 집 밖에도 잘 못 나간다. 나도 꼼꼼한 성격이 아니라 많이 불안하긴 하지만, 독립해야 할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다. 지난해 말에 엄마에게 그런 얘길 꺼냈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에 굉장히 충격 받으시더라.”
원하는 작품에 대한 주관도 점점 더 뚜렷해질 나이다.
“그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그랬다(웃음). 그때 영화 ‘파괴된 사나이’(2010, 우민호 감독)의 유괴당한 딸 역을 너무 하고 싶었다. 오디션을 5차까지 보면서 매일 한두 가지 자유 연기를 선보여야 했는데, 나는 서너 개씩 준비해 갔다. 보조 출연으로 연기를 시작했는데 오디션에서 자꾸 떨어지니까 이 길을 계속 가는 게 맞나, 고민이 많던 때였다. 엄마랑 동생도 힘들어하고. 그러다 ‘파괴된 사나이’를 만났는데 뭔지 모를 의욕이 굉장히 많이 솟았다. 지금도 이유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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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에서 수옥이가 생각하는 ‘어른의 나이’는 마흔 살이다. 본인의 생각은.
“나도 마흔 살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쯤엔 정말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나만의 색깔을 찾아내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멋있어지는 배우가 되고 싶다. ‘순정’을 하면서 연기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연기는 계산하는 게 아니라 실생활의 사소한 것들이 녹아나야 진실이 되더라. 진심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더 많이 경험하고 느끼고 싶다.”
지금 가장 해 보고 싶은 게 있다면.
“요리를 배우고 싶다. 된장찌개 같은 한식을 좋아하는데 한 번도 직접 만들어 본 적이 없다(웃음). 스무 살 넘으면 아주 짧게라도 자취를 해 보고 싶은데, 이 얘길 들으면 엄마는 또 걱정하실 거다. 그래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점점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순정’에 이어 김소현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은 2월 중 방영될 3부작 TV 드라마 ‘페이지터너’(KBS2)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천재 피아니스트 역을 맡았다.

처음엔 힘들었는데 두세 번 큰 무대에서 피아노를 치다 보니 점점 북받쳐 오르는 전율 같은 게 있었어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어떻게 담겼을지 많이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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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손예진)의 열네 살 시절로 짧게 출연한 영화 ‘덕혜옹주’(허진호 감독)도 올해 개봉을 기다린다. 검정고시와 대입을 치르고 대학에 가면 국문학이나 심리학을 전공하고 싶다는 김소현. ‘기승전연기’로 말하는 이 어른스러운 배우의 서두름 없는 도약을 기대해 본다.


일기 쓰는 김소현

TV 드라마 ‘보고싶다’(2012~2013, MBC)를 찍으면서 성격이 내성적으로 바뀌었어요. 우울한 역이다 보니 감정 기복도 심해졌죠. 그걸 바꿔보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생각이 너무 많거나 힘들 때면 일기에 비워 냈어요. 다 쓰고 나서 찢어버리는 거죠! 그렇게 잊고 나면 후련해지거든요. 지난해엔 너무 바빠서 일기를 못 썼는데 글 쓰는 건 지금도 좋아해요. 한동안 시도 썼어요. 덤벙대는 편이어서 글씨는 예쁘게 잘 못 쓰지만 대학 가서도 글은 계속 쓰고 싶어요.”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전소윤(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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