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흙수저, 이거 딱 제 얘기에요"···어느 대학로 배우의 고백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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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회당 출연료 2만원, 알바가 더 낫죠"···어느 대학로 배우의 고백①

그 선배들 충격이었죠. 근데 제가 왜 그토록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요. 솔직히 두려웠던 거 같아요. 아, 나도 저들처럼 되겠구나, 정신 놓고 살다간 저 꼴 나겠구나 했던 거죠. 미래를 본 거죠.

따지고 보면 그 전부터 안 좋았어요. 재작년엔 알코올 중독이나 마찬가지였죠. 1년에 술 안 마신 날이 일주일? 나머진 매일 술이었어요. 솔직히 관객이 너무 없었어요. 그럼 하기 싫어요. 호응 없으면 끌어내려고 또 억지부리고. 그래도 아무리 관객 없어도 하는 게 나아요. 안 하면 더 망가져요. 재작년에 '**'란 연극 3개월 했는데, 그중 보름이나 못 했어요. 제작사가 일방적으로 취소했어요, 관객 없다고. 그럼 뭐하겠어요, 마셔야지. 그렇지 않아도 가뜩이나 불안해서, 무대 위에 오르면 마치 최고가 된 것처럼 폼 잡지만, 막상 내려오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잘 아는데, 그거 잊으려고 술 마셨던 거 같아요. 근데 취소되니, 핑계 제대로죠. 일찍부터 술판 벌이고, 출연료는 당연히 날라가고, 짜증나서 또 마시고…. 그렇게 망가졌죠. 그러다 그 형들 보고 뒤통수 한대 맞은 거죠. 외려 고마운 분들이죠, 크크.

좀 나아졌어요. 여기서 살 길 찾기 어려우면 알아서 움직여야겠다 싶었죠. 그래서 에이전시 등록하고, 방송국이나 영화사 찾아가 프로필 돌리고 그래요. 아무리 단역이라도 방송 출연 들어오면 하고.

연극만 해도 먹고 살 순 있어요. 기자님도 회당 3만원 받고 어떻게 사느냐고 자꾸 묻는데, 대신 알바 하잖아요. 이것저것 따지면 얼추 한 달에 100만원 넘어요. 잘 들어올 땐 200만원도 넘고. 넉넉하진 않지만, 그런 생활 몸에 배면 살 만해요. 올 초엔 차도 샀어요. 98년형 아반떼, 70만원 주고. 갑자기 방송 오라는 데 지방이면 똥차라도 있어야 겠더라구요. 모은 돈 없지만 빚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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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돈이 아니에요. 미래에요. 그게 없어요. 예전엔 연극 하다 스타됐잖아요. 유오성 설경구 송강호 등, 황정민 조승우는 학전 출신이고. 다 연극 하면서 지금 위치에 온 거 잖아요. 근데 우리가 하는 상업극에선 그게 안돼요. 리그가 달라요. 지금 고생해도 나중에 나아지겠거니 생각하면 참죠 당연히. 근데 지금 허덕여봤자 똑같겠다 싶으니 미치는 거에요.

우리보다 사실 정극 배우가 경제적으론 더 어렵겠죠. 정극 하면 두 달 공연하고 200만원 받나. 게다가 연습까지 합치면 더 길고. 대신 그들은 명예가 있잖아요. 배우라는 자존감도 있고. 우린 그게 없어요. 그럼 막말로 상업극해서 돈 버느냐 이거에요. 그래 우리 뜨지 않아도 좋다, 대신 돈이나 많이 벌자, 그러면서 웃기고 까불고 하는 거잖아요. 근데 돈 벌었느냐 이거죠. 아무도 없어요, 배우도 회사도.

솔직히 연기가 뭐 늘겠어요. 뻔해요. 까놓고 얘기해선 전 행사 같아요. 패턴화돼 있고, 관객 유도하고, 괜히 감정 쥐어짜고. 물론 아닌 분들 있겠죠. 아닌 작품도 있을 테고. 근데 전 재주가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이 바닥 5년째 있었지만 여태 한 연기중에 무슨 영혼을 건드리는 그런 거 한 적 없었던 거 같아요. 또 하지도 못 하고요. 그럼 정극해 보라고요? 그렇게 드문드문 공연하는데 어떻게 생활이 되겠어요. 무엇보다 정극 하는 극단이 남아있긴 하나요. 요즘 대학로 다 상업극 천지인데.

예전엔 극단 체제였다고 하더라고요. 전 듣기만 했지만 선·후배로 어울리고, 혼나고 또 들이대고. 물론 안 좋은 점도 있었겠죠. 요즘은 각자에요. 프리랜서니깐. 가끔 오바하는 사람 있긴 한데 되려 욕 먹어요. 왜 저러냐고. 너나 잘하라고. 그냥 작품 한다고 만났을 뿐이고, 끝나면 째지면 그 뿐이에요. 서로 폐 안 끼치면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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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여자친구도 배우에요. 작년에 작품 하면서 만났어요. 다섯 살 연상이에요. 경력 많죠. 유명한 것도 많이 했고. 근데 저보다 더 불안해해요. 이미 서른 넘었잖아요. 얼마 안 남았다는 걸 아는 거죠. 이 바닥 여배우 수명 서른다섯 넘기기 쉽지 않다고들 해요. 솔직히 남자보다 여배우가 더 힘들어요. 캐릭터 뻔하거든요. 예쁘거나 망가지거나 둘 중 하나에요. 그런 실정에서 이제 막 대학 졸업한 어린 친구들보다 경쟁력이 있다고 자신하기 쉽지 않은 거죠. 그래서 제 여친도 연출하려고 해요. 대개 배우하다 연출로 빠져요. 제작에 나서기도 하고. 뭐 요즘엔 티켓값이 만원 아래라, 심지어 1000원에도 파니 제작해도 어렵긴 하겠지만 대신 작품은 남잖아요. 배우하면 남는 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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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요? 하고 싶죠. 근데 어떻게 결혼해요. 눈 딱 감고 결혼까진 저지를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로 애는 자신 없어요. 요즘 헬조선이니, 흙수저니 이런 얘기 하는데 딱 우리 얘기에요. 미래가 없잖아요. 예전보다 나아지는 것도 없고. 여친이 그래요, 10년전에도 회당 3만5000원이었는데, 지금도 3만5000원이라고. 저도 5년전하고 별반 다르지 않고요. 그 사이 물가가 얼마나 올랐는데.

그래도 저 요즘 학교 다녀요. 사이버 강의지만 공부하고 있어요. 스타니슬랍스키 연극론도 읽고요. 혹시 모르잖아요, 현장에 있다 교수가 될 수도 있는 거고.

누가 뭐래도 저 연기 계속할 거에요. 처음 이 바닥 왔을 때, 극단 사무실에서 매트리스 깔고 잘 때요, 그때 한여름이라 얼마나 모기가 많았는지 몰라요. 근데 뮤지컬 하느라 땀 냄새가 떠나질 않고, 옷은 눅눅하고, 아주 웬수 같았죠. 그래도 사무실 바닥에 누워 잘 때 행복했어요. 무대 서니깐. 살아 있으니깐.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연기 아무리 뻔해도 조금씩 나아지는 게 보여요.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게 연기 같아요. 정답이 없으니. 예전에 상업극하다 뜬 사람이 '응팔' 출연진 중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래도 들이대야죠. 그래서 영화 방송도 계속 해보는 것이고. 내일 모레도 하나 잡혀 있어요. 차근차근 밟아야죠. 쉽지 않다는 건 알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럼 버텨야죠. 끝장을 봐야죠. 그 심정 하나에요.

이상은 대학로 연극 경력 5년차인 정상덕(가명·28)씨와의 심층 인터뷰를 1인칭 시점으로 재가공한 내용입니다.

최민우 기자 minwoo@joongang.co.kr
일러스트 김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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