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돈이 흘러가는 곳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아주 오래전 모린 오하라 주연의 '아일랜드 연풍'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아일랜드 출신의 강인한 여성이 미국으로 건너가 겪는 고된 삶과 그 극복, 그리고 사랑 이야기로 기억된다. 불모의 땅 아일랜드는 1백여년 전 감자 흉작으로 대기근이 일면서 수백만명의 아사자를 낸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는 나라다.

그 빈국 아일랜드가 지난 10년 사이에 국민 개인당 소득이 영국을 앞지르는 부자나라로 급부상했다. 1987년까지만 해도 실업률 17%에 대외채무가 국내총생산(GDP)의 1백25%를 기록한 유럽의 지진아였다.

그 해 공멸의 위기를 느낀 정치권과 노조가 사회적 협약을 체결하고 외국인 투자유치에 진력한 지 13년 만에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10년간 국민총생산(GNP) 연평균 8.3% 성장으로 2001년 기준 영국 1인당 GDP 2만4천유로에 비해 아일랜드는 2만9천유로로 3만달러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그 기적을 일궈낸 성공비결은 무엇인가.

*** IMF이후 우리가 먹고 살길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이 최근 아일랜드 노조 대표를 만나 그 비결을 물었다. "아일랜드가 발전하는 길은 외국의 투자를 많이 유치하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면 강성노조가 버티고 있는 독일보다는 유연성을 갖는 미국식 노조운영으로 방향을 바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 매력을 느낀 외국인 직접투자가 집중돼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조선일보 6월 12일자 시론에서)

외국인 투자유치와 노동시장의 유연성, 이것이 성공의 요체임을 아일랜드는 현실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 또한 지난 10여년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파업투쟁의 질곡 속에서 이래선 다 망한다는 반성도 했다. 법과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맹세도 숱하게 했다. IMF사태 이후 이제 우리가 먹고 살 길은 동북아 물류와 금융의 허브(hub)국가를 만들어 기업하기 좋은 풍토 조성을 통해 외자유치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도 이뤄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 1일 한국은행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5월까지 외국인의 국내 직접투자 수지는 4억1천만달러로 지난해 동기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국내기업의 비싼 인건비, 노동의 경직성, 세금 등 각종 규제를 견디지 못해 중국 등으로 다시 빠져나갔다는 분석이다. 외국기업만 빠져나가는 게 아니다. 국내기업도 빠져나가고 있다.

현대자동차가 미국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에 연간 30만대의 자동차를 생산할 공장을 세우고 있다. 싼 임금, 노조 없는 공장을 주정부가 약속하고 서울 여의도 땅 두배인 공장터를 무상으로 소유권까지 넘겼다. 현대차 울산공장의 생산직 평균연봉이 5천3백만원, 몽고메리의 경우 평균연봉 3천8백만원 정도다. 현대차 베이징(北京)공장 생산직 임금은 연봉 6백만원쯤 된다. 어디에 공장을 세울 것인가. 어느 나라에 투자를 할 것인가. 그 답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왜 미국 주정부는, 아일랜드는 땅까지 공짜로 주고 저임금.무노조까지 약속하며 외국기업을 유치하고 있는가. 일자리 창출 때문이다. 몽고메리 공장에 2천2백여명의 미국인 고용창출이 예상되기 때문에 이런 저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현대차 베이징 공장의 중국 직원은 1천5백여명이다. 1, 2천명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기 위해 정부가 나서고 노조가 협조하는 것이다.

*** 저임금에 無노조도 약속하는데

포스코개발이 상하이(上海) 푸둥(浦東)에 '포스 플라자'(浦項廣場)을 세웠다. 상하수도와 전력요금이 엄청나게 나왔다. 상하이 담당공무원을 찾아 애로를 토로했다. 곧바로 법과 규정을 따지지 않고 요금을 즉각 인하했다. 정부의 이런 협조 덕분에 현재 푸둥지구엔 78개국이 4백억달러에 이르는 투자를 하고 있다.

세계 5백대 기업 중 1백50여 기업이 이곳에 진출했다. 아일랜드의 경우 외국기업의 법인세를 최고 10%에서 0%까지로 낮추는 데 노사정이 모두 합의했다. 해서 아일랜드 경제에서 외국 투자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총수출의 75%, 제조업 생산의 50%를 차지한다. 일자리.먹거리가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노조의 경영참여니, 네덜란드식이니 영.미식이니 공리공담에 빠져 세월만 보내고 있다. 노조는 오늘도 붉은 띠를 동여매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지금 우리는 이럴 때가 아니다. 일자리.먹거리 없는 곳에서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하나. 아일랜드.푸둥을 배우고 실천하자. 2만달러 시대를 여는 지름길이 여기에 있지 않은가.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