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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은 바보짓, 우리나라 영재학교엔 영재가 없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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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호 3 면

지난달 20일부터 나흘간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의 화두(話頭)는 ‘제4차 산업혁명’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지도자들은 로봇과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의 위기와 기회를 얘기했다. 그 다보스 포럼 메인 행사장 로비 한가운데는 4차 혁명을 상징하는 로봇 한 대가 서 있었다. 지난해 미국 국방부 산하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로봇챌린지에서 우승한 한국 KAIST의 로봇 ‘휴보(Hubo)’였다. 휴보의 가슴에는 이번 포럼의 공식 참석자를 뜻하는 출입증이 달려 있었다. ‘Hubo-World Citizen 16’. 휴보는 다보스 포럼에 초대된 유일한 로봇이다. 동시에 인간과 동등한 포럼의 참가자 신분을 받은 첫 번째 로봇이었다. 다보스를 다녀온 강성모 KAIST 총장과 ‘휴보 아버지’ 오준호 교수를 4일 중앙SUNDAY가 만났다.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초대된 KAIST 휴머노이드 로봇 휴보가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자신의 기사가 실린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 신문을 읽고 있다. [사진 오준호 교수]

“하버드대·옥스퍼드대 등 세계 정상의 대학 총장들과 함께 4차 혁명 속 대학의 역할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인공지능과 로봇·사물인터넷이 등장하는 향후 5년 안에 주요 15개국에서만 71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0만 개의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라고 합니다. 500만 개의 일자리가 순감하다는 얘기지요. 급변하고 있는 세상을 이끌어 나가기 위해서는 대학이 지금 모습으로는 안 되며, 창의적이고 도전정신이 있는 인재들을 길러 낼 수 있도록 혁신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습니다.”


다보스 포럼을 얘기하는 강성모 총장의 얼굴엔 그때의 흥분이 다시 묻어났다. 강 총장은 한국 대학 총장 중 유일하게 세계대학지도자포럼(GULF:Global University Leaders Forum) 세션에 공식 초청 멤버로 참석해 ‘대학 교육의 미래와 사회 발전을 위한 과학의 역할’을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세계 주요 대학 총장들은 이 자리에서 한국 KAIST의 혁신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강 총장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중국 시장에서 삼성전자의 스마트폰이 5위권 밖으로 밀려나고, 한국 수출이 급감하는 현실에서 한국 대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자리를 함께한 오준호 교수는 대학의 현실뿐 아니라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대학이 4차 혁명에 맞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인재를 길러 내려면 어떻게 혁신해야 하나. 강 총장=“지금처럼 교수가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방식으로는 우리 아이들에게 미래가 없다. 시험을 잘 쳐서 성적을 잘 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해서는 토론을 통한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이 수업 전 인터넷에 미리 올라온 과제를 읽고 공부한 뒤 강의실에서는 토론하는 방식으로 KAIST 수업을 바꿔 나가고 있다.” 오 교수=“외국에서 만난 교수들이 ‘당신의 학생도 우리 학생들만큼 멍청합니까’라며 물어보는 경우가 있다. 요즘 대학생들은 도전의식이 없다. 그건 KAIST도 마찬가지다. 중·고교부터 대학까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정답만 찾는 주입식 교육을 받다 보니 그 영향이 대학원 석·박사 학생들까지 미칠 정도로 심각하다.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를 주면 스스로 고민해 풀려 하지 않고 인터넷부터 찾아 하나의 정답만 구하려 한다.”


강의보다는 토론 위주로 수업 바꿀 것 -KAIST에 입학하는 과학영재라는 학생 대부분이 중·고교 때 학원에서 밤을 새우며 주입식 선행학습을 해 온 아이들이 아닌가. 오 교수=“선행학습 같은 바보짓이 없다. 머리 좋은 아이들이 이상하게 훈련을 받고 대학에 들어오고 있다. KAIST 입학생은 우수한 학생들이지만 그렇게 선행하다 겨우 살아남은 아이들이다. 잠재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초·중·고교 12년 동안 주입식 교육과 선행학습의 포로가 돼 틀에 갇힌 채 바보가 돼 간다. 영재학교에 영재가 없다.” 강 총장=“우리나라 입시가 지금처럼 계속된다면 큰 문제다. 결국 대학에 자율권이 더 보장돼야 한다. KAIST는 교장 추천으로 들어오는 학생이 많다. 교장들에게 ‘당신들을 믿는다. 대신 교장 추천으로 들어온 학생들이 기대만큼의 퍼포먼스를 내지 못하면 그 학교에서 추천할 수 있는 학생 수를 줄이겠다’고 말한다. 고교 교장들에게 자율성과 책임을 주는 방향으로 입시를 계속 바꿔 나갈 계획이다.”


-학생이 바뀌려면 교수도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강 총장=“동의한다. 발명 특허와 논문 개수에 매달리면 좋은 연구가 나오기 어렵다. 다보스에서 과학학술지 네이처의 편집장과 세계 유명대 총장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좌담회를 했다. 케임브리지대 총장은 대학에서 교수 평가를 안 한다고 했다. 미국의 경우 한국처럼 교수 평가를 엄격히 하는데, 그러다 보니 연구를 좋아하는 교수들이 미국 대학을 떠나 케임브리지대로 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밥 짓는 데 솥뚜껑을 자꾸 열어 보면 밥이 설익을 수밖에 없다. 교수 평가를 안 할 수는 없지만 지금처럼 일률적으로 평가하면 톱클래스의 교수들이 평균치로 다 끌려 내려간다. KAIST는 3월부터 교수 평가방법을 바꾼다. 지금까지는 교육·연구·기여를 30대 40대 30으로 분배해 평가했지만 앞으론 교육·연구·기여를 30대 10대 20으로 낮추고, 나머지 40%를 어느 항목에 보탤 것인지 교수가 자율적으로 선택해 목표를 세우고 평가도 이에 맞게 할 계획이다.”   로봇으로는 처음 다보스에 초청받은 휴보 -다보스에 온 지도자들이 휴보를 어떻게 평가했는지도 궁금하다. 오 교수=“휴보는 다보스에 초대된 유일한 로봇이다. 지난해 DARPA 로봇챌린지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은 덕분이다. 수많은 VIP가 메인 행사장 로비에 전시된 휴보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휴보의 시연 시간이 하루 세 차례였지만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쉴 시간이 없었다. 일일이 명함을 받긴 했지만 하도 많은 사람을 만나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기억하기도 어렵다. 이튿날에는 파이낸셜타임스 국제면에 톱기사로 다보스에 온 휴보가 소개되는 바람에 더 많은 사람이 몰렸다. 그들은 진지하게 휴보에 대한 질문을 하고 또 다큐멘터리에서나 보던 것을 실제로 본다며 재미있어 했다. 블룸버그통신은 기사에서 이제는 다보스가 사람뿐 아니라 로봇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는 내용을 싣기도 했다. 한국 과학자로서 자부심을 느꼈다.”


-일본 혼다의 아시모나 미국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빅도그 같은 로봇이 휴보보다 더 뛰어나지 않나. 그들은 왜 다보스에 안 왔나. 오 교수=“TV에 팬시하게 보이는 것과 실전은 큰 차이가 있다. DARPA 로봇챌린지에서 세계 최고라고 평가받는 혼다나 보스턴다이내믹스, 미 항공우주국(NASA) 등의 로봇이 다 참여했지만 우리 휴보만큼 미션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들은 휴보 앞에 무참히 깨졌다. 우리는 대회 한 달 전부터 휴보의 안전와이어를 제거하고 500m 밖에서 휴보를 조종하며 혹독한 전지훈련을 했다. 우승 비결은 실전 훈련에 있었다고 얘기할 수 있다. 이번 다보스는 DARPA의 검증을 신뢰한 결과다.”


-그래도 의외다. 혼다 아시모나 보스턴다이내믹스의 로봇 개발에 수천억원이 들어갔는데 휴보는 7년 동안 35억원의 연구비만 지원됐다고 들었다. 오 교수=“사실이다. 그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뤄 낸 성과이기 때문에 더욱 소중하다. 사실 휴보는 그래도 국내에서는 예외적인 지원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로봇기술 발전은 최근 10년간 상대적으로 퇴보했다. 로봇산업을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에서는 3~5년 후 팔릴 수 있는 로봇에만 투자한다. 이런 환경 속에서 로봇에 대한 원천기술을 확보하기란 어렵다. 산업부가 지나치게 상업적인 데만 몰두하고 있어 창의적인 연구가 설 땅이 없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미국·일본 등 로봇 선진국과 상대적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외국에 알려진 우리 로봇 중 휴보 외에 뭐가 더 있나. 예전에 과학기술부가 해체되면서 원천·기초기술 개발은 미래창조과학부(옛 교과부) 소관으로 넘어가고, 로봇은 5년 미만의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산업부 소관이 됐다. 산업부 로봇 담당 사무관이 로봇산업을 짊어지고 있다. 이대로는 4차 혁명의 쓰나미에 올라타는 게 아니라 휩쓸려 빠져 죽을 것이다.”   고령화 사회 대비하는 기술 강연도 진행 -이번 다보스에서 KAIST가 한국 대학 최초로 아이디어스랩(Ideas Lab)을 운영했다고 들었다. 강 총장=“KAIST를 포함해 아이디어스랩에서 단독 세션을 운영하는 대학은 미국의 스탠퍼드대·매사추세츠공대(MIT)·카네기멜런대·UC버클리대, 영국의 케임브리지대·임피리얼칼리지 등 모두 7개에 불과하다. 대회 주최 측에서 세계 최정상의 대학을 선별해 비용을 대고 초대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이상엽 교수 등 생명공학 분야 교수 4명이 ‘고령화 사회에서의 바이오테크놀로지’를 주제로 아이디어스랩을 운영하고 KAIST의 연구 성과를 알렸다. 70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방에 100명이 넘는 참가자가 몰려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원래 일정은 한 시간이었지만 발표 후 질문과 토론이 계속 이어지면서 예정된 시간을 한 시간 반이나 초과했을 정도로 대박을 냈다.”


강찬수·최준호 기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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