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찾기] 숲속서 일구는 '작은 인생역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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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를 떠돌던 노숙자 시절은 더 이상 떠올리기 싫습니다. 공기 맑고 산수 좋은 곳에서 숲을 가꾸며 돈도 버니 너무 좋습니다."

2일 강원도 정선군 북면 구절리의 해발 9백m 국유림.

빽빽이 나무들이 들어찬 숲 한 구석에서 10여명이 일사불란하게 "영차, 영차"를 외치며 막 베어낸 나무들을 임도로 끌어내리고 있다. 지난 1월 20대부터 60대까지 16명이 모여 결성한 정선자활영림단(단장 이영의.52) 단원들이다. 손놀림이 제법 능숙해 보이지만 이들은 외환위기 때 직장을 잃거나 부도를 당해 일거리를 찾아 헤매던 아픔을 지닌 도시 출신들이다.

이들이 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서울시가 운영하는 노숙자 수용시설인 '서울 자유의 집' 주선으로 2000년 산림청이 실시한 '숲가꾸기 공공근로사업'에 참여한 게 계기였다.

강릉.삼척.태백.정선 일대 국유림에서 일했던 이들은 지난해 이 사업이 끝나면서 다시 실직자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으나 산림청에서 자활영림단을 구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임업 기능인으로 새로운 인생을 펼쳐보겠다는 각오로 지난 1월 이 모임을 만들게 됐다. 대부분이 서울 등 도회지에 가족들을 두고 와 월 60만~70만원의 수입을 쪼개 생활비를 보내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쓰라린 기억이 묻어 있는 도회지로의 귀환(?)을 포기하고 새 삶을 개척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카센터를 경영하다 부도가 났다는 노총각 조휘정(41)씨는 "취업하기 어려운 도회지 대신 시골에서 산을 가꾸며 돈도 벌어 가정도 일굴 생각"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자유의 집 직원으로 공공근로사업 당시 현장 관리를 맡았던 李단장도 이들과 함께 눌러앉아 고락을 함께 나누고 있다.

이들은 자활 의지를 다지기 위해 정선군 북면 여량리에 방 8개가 딸린 80여평 규모의 농가주택을 월 50만원에 빌려 공동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은 산림청이 발주하는 각종 산림 관련 사업. 첫 사업으로 지난 4월 7일 시작한 정선 구절리 일대 5백~1천m의 고지대 75㏊ 간벌사업을 지난달 30일 끝냈다. 이어 지난 1일부터 8월 4일까지 일정으로 인근 국유림 40㏊에 대한 간벌 및 천연림 보육사업을 맡아 하고 있다. 매년 3월부터 11월까지 일감이 줄줄이 있어 1인당 연간 1천5백만~2천만원의 소득이 보장된 상태다.

이들은 자활에 성공하기 위해 엄격한 자율 규정을 정해 놓고 있다. 사업수주액의 10%는 겨울철 일거리가 없을 때에 대비한 생활비와 재교육비로 공동 적립하고 유류비.숙식비 등 각종 경비를 공제하고 남은 돈을 똑같이 분배한다.

개인 소득의 60%도 각자 저축하기로 약속했다. 식비도 최대한 절약하기 위해 할머니 한명을 고용해 점심도 도시락으로 해결하는 등 알뜰살림을 하고 있다. 이런 노력 덕분에 1인당 숙식비가 한달에 8만원밖에 안돼 이번 간벌사업의 대가로 9천2백만원을 받으면 1인당 5백여만원의 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식품회사에 다니다 연령이 많다는 이유로 해직됐다는 성락관(60)씨는 "그동안 번 돈으로 제대 후 대학에 복학한 아들에게 매년 4백만~5백만원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보내주고 나머지는 노후에 대비해 저축을 하고 있다. 공기가 좋은 이곳에서 근력이 다할 때까지 일할 계획이다"며 즐거워했다.

이들은 또 농가 옆 텃밭 3천여평도 임대해 옥수수와 .콩.감자 등을 심고 닭과 개 40여마리도 키우는 등 틈틈이 농사일도 배우고 있다. 앞으로 이곳에 특화 작물을 심어 부수입도 올릴 계획이다.

이들은 전문 임업 기능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6주간의 전문교육을 이수했다. 2명은 이미 산림기능사 자격증을 땄고, 나머지도 연말까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주경야독에 빠져 있다.

李단장은 "연령과 전직이 다양하지만 똑같은 아픔을 겪은 탓인지 마치 한가족처럼 우애가 깊다"며 "3년 안에 1인당 4천만~5천만원씩 출자해 토속음식점을 여는 등 부업거리를 창업하는 게 1차 목표"라고 포부를 밝혔다.

정선=홍창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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