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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29)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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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1 면

김석주 묘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에 있다. 서인과 남인을 넘나든 최고의 실세였으나 남인 제거를 위한 정치공작을 주도하면서 명성이 급격히 퇴락했다. 무덤의 무성한 풀이 후세 사람들에게 권력무상을 경계하는 듯하다. 사진가 권태균


숙종 14년(1688) 11월 21일. 8명의 노비가 메는 옥교(屋轎:지붕 있는 가마)가 궐 안에 들어섰다. 옥교에 탄 여인은 10월 27일 숙종이 바라던 왕자를 낳은 후궁 장씨의 모친 윤씨였다. 옥교에 탄 여인을 알아본 지평 이익수(李益壽)는 사헌부 금리(禁吏)와 조례(관아 노비)를 시켜 여인을 끌어내리게 한 다음 노비들을 처벌하고 상소를 올렸다. 숙종은 화가 났다. 혹독한 형신을 받은 금리와 조례 두 사람은 귀양을 가기 위해 옥문을 나섰다가 곧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의 본질은 차기 왕위를 둘러싼 서인과 남인 사이의 정권 다툼이었다.?

장희빈 초상 역관 집안의 서녀인 장희빈은 아들 균(훗날 경종)을 낳았으나 인현왕후를 저주한 혐의로 죽임을 당했다. 우승우(한국화가)


훗날 장희빈이라 불리게 되는 소의 장씨는 중인 역관(譯官) 집안의 서녀(庶女)였다. 숙부 장현(張炫)은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라고 기록될 정도로 부자인 데다 수역(首譯:역관의 우두머리)으로서 숙종 3년(1677)에는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그만큼 남인 정권과 가까웠는데 이 때문에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종친 복창군(福昌君)과 함께 유배당했다.? 서인들은 소의 장씨(장옥정)를 남인들의 여인계로 보았고 실제로 그런 성격이 있었다. 장옥정은 남인들과 가까웠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계비)전의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왔는데, 『숙종실록』은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고 전하고 있다. 대비의 후원을 업은 장옥정은 막 인경왕후 김씨를 잃은 청년 임금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제동이 걸렸다. 숙종의 모친 명성왕후 김씨가 장씨를 강제로 출궁시킨 것이다. 서인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는 1681년(숙종 7년) 숙종을 서인 명가인 민유중(閔維重)의 딸과 재혼시켰으니 그가 바로 인현왕후 민씨였다.?


그러나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 9년(1683) 세상을 떠나면서 상황이 변했다. 복상기간이 끝나자 자의대비의 권고를 받은 숙종은 다시 장옥정을 입궐시켰다. 『숙종실록』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다. 『숙종실록』이 “내전(인현왕후)이 (장씨를) 다스리기 어려운 것을 근심하여, 임금에게 권하여 따로 후궁을 선발하게 하니, 김창국(金昌國)의 딸이 뽑혀 궁으로 들어왔다”라고 기록하는 것처럼 인현왕후는 질투보다 당익(黨益)을 앞세울 줄 아는 냉혹한 정객이기도 했다.


장옥정은 서인들의 이런 반발을 비웃듯 버젓이 왕자를 생산했다. 숙종은 재위 14년 만에 처음으로 왕자를 낳았으나 집권 서인이 하례하지 않고 왕자의 외할머니까지 끌어내자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숙종은 “국본(國本:세자)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매인 곳이 없으니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에 있지 않다. 만약 지체시키고 어정거리고 관망(觀望)하면서 감히 이의(異議)가 있는 자는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고 강하게 말했다. 국본(國本) 운운한 것은 갓 낳은 왕자를 후사로 결정할 속셈을 표명한 것이었다.?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이 반대한 것을 필두로 대부분이 반대했다. 반대 논리는 단 하나였다. ‘중궁(中宮:인현왕후)께서 춘추가 한창이시니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숙종은 “대계(大計)는 이미 정해졌다”고 거절하고 갓난 왕자를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했다. 닷새 후인 1월 15일에는 이 사실을 종묘·사직에 고묘(告廟)했다. 왕조 국가에서 선왕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에 고하면 번복할 수 없으므로 장희빈이 낳은 아이가 숙종의 뒤를 이을 것이었다.?


그러나 고묘 15일 후인 2월 1일 서인 영수 송시열이 재논의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림으로써 파란이 일었다. 숙종은 정권을 갈아치우기로 결심하고 다음날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하고 소론 여성제(呂聖齊)로 대신했으며 남인 목내선(睦來善)을 좌의정, 남인 김덕원(金德遠)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2월 4일 송시열은 제주도 유배형에 처해졌다. 재집권에 성공한 남인들은 10년 전 경신환국 때 당한 정치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숙종 15년(1689) 후궁 장씨가 왕자를 낳음으로써 9년 만에 재집권한 남인들은 과거사 청산에 나섰다. 남인 허새·허영 등을 역모로 고변해 죽게 만든 임술고변의 기획자 김석주는 숙종 10년(1684) 이미 사망했으므로 김익훈이 주요 대상이었다. 남인들은 의금부에 국청을 설치하고 숙종 15년 2월 25일 김익훈 등 6인을 체포해 투옥했다.?임술고변은 정치공작 차원에서 조작한 사건이므로 그 재조사는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정치보복으로 확대되는 흐름이었다. 남인 정권은 전 영의정 김수항과 송시열을 사형시키려 했다.?증오가 증오를 낳고, 죽음이 또 다른 죽음을 낳는 악순환이었다.?


송시열이 숙종 15년(1689) 2월 1일 원자 정호가 시급했다는 비판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날 정권을 남인으로 갈아치웠다. 정권까지 갈아치운 목적은 왕비 민씨를 내쫓고 후궁 장씨를 왕비로 올리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날 숙종은 장옥정의 선조 3대에게 정승을 추증(追贈)했다. 3대가 모두 정승에 증직된 드문 경우였다.?


남인 정권이라고 해서 뚜렷하게 드러난 잘못이 없는 왕비 폐출에 동의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왕비 폐출과 남인이 원하는 송시열의 죽음을 맞바꾸기로 결심했다. 83세의 노구(老軀)는 결국 사형으로 끝났다. 9년 전 허적과 윤휴의 사형을 남인들이 정치보복으로 여긴 것처럼 김수항과 송시열의 사형 역시 서인들은 정치보복으로 여겼다. 송시열은 임종 때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손을 잡고 “학문은 마땅히 주자(朱子)를 주(主)로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숙종은 재위 16년(1690) 6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고, 그 해 10월 22일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다. 정권을 노린 남인과 왕비 자리를 노린 장옥정의 결합이 성공한 것이었다.


후궁 장씨가 인현왕후 민씨를 쫓아내고 왕비에 오른 4년 후인 숙종 19년(1693). 숙종은 다른 여인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10월 『숙종실록』은 “왕자가 탄생했는데 소의(昭儀:정2품)가 낳았다”고 전한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 무렵 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이 환국(換局)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이 주도했다.? 소론 김만중(金萬重)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그러나 남인들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신년에 정권을 빼앗겼을 때 허적·윤휴를 비롯한 많은 당인이 사형당한 사건을 잊지 않고 있었으며, 기사년 정권을 되찾았을 때 김수항·송시열 등 많은 서인을 사형시킨 일도 잊지 않고 있었다. 다시 정권을 빼앗기면 대대적인 정치보복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공존의 틀이 붕괴된 붕당정치는 상대를 죽여야 자신이 사는 제로섬 게임으로 변질됐다. 남인들은 서인들의 환국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가 선제 공세를 펼쳤다.?


환국 기도에 대한 의금부 수사 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는 서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한 중인이나 상인들이 대거 등장한다.?양인(良人)들이 더 이상 정치를 사대부만의 전유물로 인식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의식이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숙종 20년 3월 29일에는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幼學) 김인(金寅)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 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그러나 숙종 20년 4월 1일 밤 2고(二鼓:밤 9~11시)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備忘記)가 전세를 뒤집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覆逆) 장계(狀啓)를 작성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승지 전원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 간쟁 자체를 막겠다는 뜻이었다.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五衛將) 황재명(黃再命)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徐文重)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 숙종 20년의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다. 송시열·김수항·민정중 등 사사당했거나 유배지에서 죽은 서인 인사들이 복권되었고, 성균관 문묘(文廟)에서 출향(黜享:제사 대상에서 쫓겨남)당한 서인의 종주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이 다시 제향되었다. 숙종의 느닷없는 변심에 남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윤증 초상과 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다. 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에 의해 소론 영수로 추대됐다.


정치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됐다. 서인들을 역모 혐의로 고변했던 함이완은 물론 우의정 민암과 아들 민종도, 이의징·조사기·노이익과 왕비 장씨의 친신(親信) 궁녀 정숙 등이 사형당했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남인들은 14명이 사형당하고 67명이 유배되는 처벌을 받았다.?왕비 장씨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폐비 민씨가 다시 복위됐다. 그러나 서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던 양인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거꾸로 강만태는 난언(亂言) 혐의로 참형(斬刑)당하고 가산은 적몰(籍沒)됐으며, 김도명·변학령 등은 석방된 것에 만족해야 했다. 숙종 때의 잦은 환국과 왕비 교체는 정당정치의 말기적 현상에 국왕까지 가담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잦은 정권교체를 통해 왕권은 강화됐지만 원칙을 상실한 잦은 환국은 국왕과 왕비마저도 파당적 지위로 격하시켰다.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한 지 2년 6개월 후인 숙종 8년(1682) 10월 21일. 전 병사(兵使) 김환(金煥)과 출신(出身: 무과에 급제했으나 아직 벼슬에 나가지 못한 사람) 이회, 기패관(旗牌官: 군영의 장교) 한수만 등이 대궐에 나와서 상변(上變)했다. 남인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이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대왕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시키려 했다는 고변이었다. 즉각 국청이 설치되어 수사에 들어간 와중에 출신(出身) 김중하(金重夏)가 전 대사헌 민암 등이 사생계(死生契)를 조직했다면서 다시 역모를 고변했다. 같은 달 27일에는 어영대장 김익훈(金益勳)이 아방(兒房: 궐내 장신들의 휴게소 겸 숙소)에서 숙종에게 역모를 밀계했다. 이것이 숙종 8년(1682:임술년) 발생한 임술고변인데 그 내막은 대단히 복잡하지만 목적은 단 하나 남인들을 도륙하기 위한 것이었다.?이 사건의 배후는 숙종의 외척이자 우의정인 김석주(金錫胄)였다. 허새는 압슬형(壓膝刑)을 비롯해 혹독한 형신(刑訊)을 견디며 부인하다가 끝내 시인했고, 서종제(庶從弟) 허영 역시도 고문에 못 이겨 혐의를 시인했다.?그러나 복평군을 끌어들이는 것은 끝내 거부했다.?허새가 물고(物故: 죽음)될 위험이 있자 서둘러 사형시키고 허영도 지정률(知情律: 불고지죄)로 처형했다. 이 사건은 많은 의혹을 낳았다.?서인들끼리도 혼선이 생겼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27호 2009년 8월 15일, 제128호 2009년 8월 23일, 제129호 2009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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