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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공작, 당쟁의 피바람 키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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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호 1 면

[장형 신도비와 묘] 역관 장형은 서녀 장옥정이 왕자를 낳은 후 영의정에 증직되고, 옥정이 왕비가 된 후 옥산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석물을 세우는 데 1500명이 동원되었다.

【총평】


조선을 건국한 혁명파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중앙 관직을 차지하면서 중앙 집권과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성리학적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데 앞장섰다. 이들을 관학파라 하는데, 관학파는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에도 포용적인 자세를 보였으며, 기술을 중시했다.


관학파는 세조 이후 훈구파로 불렸다. 훈구파는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대농장을 소유하고 부유한 생활을 했다. 고려 말에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사림파는 성종 때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와 대립했다. 사림은 훈구파의 부정과 비리를 비판했다.


성종은 훈구 세력의 힘을 누르고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인재를 필요로 했다. 이때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관직에 나간 사림은 주로 3사에 배치되어 훈구 세력의 잘못을 비판했지만 크게 충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성종의 뒤를 이어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 사이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사화(士禍)가 일어 났다.


사림은 네 차례에 걸친 사화(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해 나갔다. 16세기 후반 선조 때에 이르러서는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선조는 훈구 세력을 멀리하고 사림 세력을 대거 기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16세기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사림은 학설과 지역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를 형성하고 학문적 토론을 본격화했다. 사림은 유명한 학자를 중심으로 학문과 정치 성향이 같은 사람들끼리 붕당을 이루었는데, 이후 붕당은 중앙 정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경쟁했다. 붕당 정치는 재야 사림의 의견까지 폭넓게 수렴할 수 있고, 붕당 상호 간에 비판과 견제가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자기 붕당의 이익만을 앞세우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폐단이 나타나게 되었다.


사림은 명종 때 나타난 외척 정치의 잔재를 청산하는 문제 둘러싸고 갈등했다. 인사권을 지닌 이조 전랑의 임명 문제로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는 동인과 서인의 붕당을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현종 때까지는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그러나 현종 때 두 차례의 예송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에 대립이 격화된다. 정치 권력은 점차 고위 관원에게 집중되었으며, 언론기관이나 재야 사족의 정치 참여가 어려워지면서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숙종 때에는 당파 간 대립이 격화되었다. 숙종 때 집권한 남인은 서인의 관직 진출을 허용하여 남인의 우세 속에 서인이 공존하게 되었다. 숙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집권 당파를 교체하는 방식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환국이 되풀이되면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상대방에 대한 탄압과 보복이 계속되었다. 공존의 원리가 무너지면서 공론이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 이용되었다.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이 일어나면서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났다.


숙종은 즉위 초에 남인의 윤휴 등이 북벌론을 제기하며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 세력을 넓혀 가자 이들을 몰아내고 서인 중심의 정권을 세웠다(경신환국). 정권을 잡은 서인은 정국 운영 방식을 두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다. 노론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북벌론의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도 민생 안정을 강조했고, 소론은 윤증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개척과 국방 강화를 주장했다. 소론은 절충적인 성격을 지닌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한 양명학과 지나친 유교의 형식화를 비판한 노장사상을 수용하여 성리학을 융통성 있게 이해하려고 했다.


숙종은 남인계 후궁인 장희빈이 낳은 왕자(경종)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는 노론 세력을 몰아내고 남인 정권을 성립시켰다. 이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처형당했다 (기사환국). 그러나 숙종은 5년 후 장희빈을 사사하면서 다시 남인을 몰아내고 노론 정권을 회복시켰다(갑술환국). 왕이 환국을 주도함에 따라 종친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고, 당파의 이익을 대변했던 3사와 이조 전랑의 비중은 줄어들게 되었다.

윤증 초상과 고택 충남 논산시 노성면에 있다.송시열에게 실망한 젊은 서인들에 의해 소론 영수로 추대됐다.

갑술환국으로 남인은 집권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후 노론과 소론이 연합한 가운에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이에 소론은 일부 남인과 합세하여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 전제화로 붕당 정치가 변질되자 그 폐해는 심각했다. 정치적 견제 세력이 사라지자 집권 세력은 나라의 이익보다는 자기 당의 이익을 앞세웠다. 또한 권력을 지속하려는 욕심에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개입하여 왕의 권위를 위협하기도 했다.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비변사의 정치적 역할이 강화되었다. 정권을 잡은 서인은 권력 강화 위해 왜란 이후 최고 정치 기구로 떠오른 비변사를 장악하고, 이를 통해 정치를 주도했다. 핵심 인사들이 비변사에 모여 국가의 중요한 정무 사항을 논의하면서 업무의 효율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국왕의 권위가 낮아지고 지역별?행정 부서별 현안이 무시되었으며, 권력을 장악한 붕당의 의견이 지배적으로 관철되는 문제도 나타났다.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해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했다. 공평한 인사 관리를 내세운 숙종의 탕평책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오히려 편당적 인사로 환국이 빌미만 제공했다.


향촌 자치를 주장하던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향촌 사회의 지배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17세기 초에 경재소가 없어지고 유향소는 향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향촌 자치 조직의 이름은 바뀌었지만, 통제 기구가 없었기 때문에 사림 양반에 의한 향촌 자치가 강화되었다. 사림은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향약을 만들어 군현 등을 단위로 시행했으며, 향촌 사회 양반의 명단인 향안을 작성하였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지방 양반들은 자치 기구인 향회를 조직하여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했다.


사족은 문벌을 형성하기 위해 족보 편찬에도 힘썼다. 가문의 내력을 기록한 족보는 안으로는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밖으로는 다른 집안이나 하층 신분에 대해 우월 의식을 가지게 했다. 족보는 혼인 상대자를 구하거나 붕당을 구별하는 데도 활용되었다.


【핵심 키워드】


☞ 학연에 따라 모인 사림은 내부 토론을 거쳐 형성된 여론인 공론을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어 갔는데, 이를 [붕당 정치]라고 한다. 정국이 급격하게 바뀌는 [환국]이 일어나면서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났다. 숙종은 즉위 초에 남인의 윤휴 등이 북벌론을 제기하며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 세력을 넓혀 가자 이들을 몰아내고 서인 중심의 정권을 세웠다([경신환국]).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왕자(경종)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에 반대하는 노론 세력을 몰아내고 남인 정권을 성립시켰다. 이때 송시열, 김수항 등이 처형당했다 ([기사환국]). 숙종은 장희빈을 사사하면서 다시 남인을 몰아내고 노론 정권을 회복시켰다([갑술환국]). 이 후 남인은 집권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후 노론과 소론이 연합한 가운에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는 양상이 전개되었다.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해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했다.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를 장악하면서 향촌 사회의 지배 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17세기 초에 경재소가 없어지고 유향소는 [향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사림은 다양한 형태의 [향약]을 만들어 군현 등을 단위로 시행했으며, 향촌 사회 양반의 명단인 [향안]을 작성했다. 향안에 이름이 오른 지방 양반들은 자치 기구인 [향회]를 조직하여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했다. ☜


【예상 문제】


1.?밑줄 친 ‘여러 정책’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사림이 조정에 참여하여 공론이 실현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사림이 조정에 없어 공론이 헛되이 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 …… 지난 기묘년에 사림이 여러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론을 지켜나갔는데, 남곤?심정의 무리가 기회를 틈타 그들을 일망타진하였다.


- 율곡전서 -


① 경연과 언관의 활동 강화


② 공신들의 위훈 삭제 추진


③ 인재 등용을 위한 현량과 실시


④ 공론 수렴을 위한 붕당 활성화


⑤ 도교 행사를 담당하는 소격서 폐지

* 2007학년도 6월 모의평가 18번


2.?다음 글에 나타난 붕당 정치의 전개 과정과 관련하여 탐구할 만한 문제로 적합하지 않은 것은?

초기의 붕당 정치는 동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시작되었는데,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고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서인에 의해 북인 정권은 몰락하고 이후의 정국은 현종 때까지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이 참여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① 사화의 발생 원인


② 북벌 운동의 배경


③ 예송 논쟁의 쟁점


④ 정여립의 모반 사건


⑤ 인조 반정 후의 외교 정책

* 2005학년도 6월 모의평가 18번


3.?탕평론을 제시한 왕들에 대한 서술이다. (가) ~ (다) 왕에 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가) 은/는 붕당의 명분을 좋아하지 않았다. 당론에 입각한 붕당의 의리보다 군신 간의 의리를 세우는 것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붕당을 없애자는 논리에 동의하는 신하들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 (나) 은/는 단순히 여러 붕당의 인재를 함께 등용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오히려 붕당의 명분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밝히고, 각 붕당에서 의리에 투철한 인물을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 (다) 은/는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고 특히 이조 판서의 임명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한 붕당을 내몰고 다른 붕당에 정권을 일임하는 결과를 여러 차례 초래하였다.


① (가)는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였다.


② (나)는 대표를 보내 청나라 관리와 함께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하였다.


③ (다)는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④ (가)가 없앴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 관행은 (나)의 재위시기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⑤ (나)는 속대전을, (다)는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인 법전 체계를 정비하였다.

* 2012학년도 6월 모의평가 14번


4.?다음 수행 평가 계획서에 따라 작성한 보고서에 들어갈 탐구 주제와 붕당을 짝지은 것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 탐구 주제???????????????????? 붕당

① 예송의 전개 과정과 정치적 영향?????? (가), (나)

② 인조반정 이후 외교 정책의 변화?????? (가), (다)

③ 성리학을 탈피한 다양한 사상의 모색?? (나), (마)

④ 호락 논쟁의 전개와 사상적 의의?????? (다), (라)

⑤ 이이 및 성혼의 학문 경향과 계승????? (라), (마)

* 2012학년도 6월 모의평가 20번

?

5.?다음은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꾸며 본 어느 왕의 회고록의 일부이다. 이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갑술년에 폐비 민씨의 복위 운동이 일어나자 정권을 담당했던 [가]는(은) 이를 계기로 반대파를 제거하려 하였다. 폐비 사건을 후회하고 있던 나는 도리어 그들을 물리치고 [나]를(을) 등용했다. 등용된 이들은 이전 집권 세력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주장하는 [다]와(과)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에 선 [라](으)로 갈라져 치열하게 싸웠다.


나는 본래 관료들의 인사 관리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탕평을 이루고 싶었다. 하지만 한 당파가 일거에 몰락하고 다른 당파가 정권을 독차지하는 격변이 발생하여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위 회고록에 기록될 수 있는 내용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보기]


ㄱ. 대전통편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재정리하였다.


ㄴ.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였다.


ㄷ. 청나라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윤휴는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ㄹ. 대표를 보내 청나라 관리와 함께 백두산 정계비를 세우게 하였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 2009학년도 6월 모의평가 17번


6.?밑줄 친 부분에 언급된 정치 운영 과정에서 나타난 상황으로 옳은 것은?


당파의 습성이 고질화되어 손 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성상께서는 이쪽이 낫다고 생각되면 오로지 이쪽만을 등용하였고, 저쪽이 낫다고 생각되면 다시 저쪽만을 등용하였다. 그렇지만 우리 선왕(先王) 초기까지도 당파가 여전히 싸움을 일삼아 엉킨 감정을 풀기 어려웠다. 이에 선왕이 탕평책의 정사를 행하여 후손을 위한 좋은 계책을 나에게 남겨주었다.


-조선왕조실록-


① 주화론과 주전론이 대립하면서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② 노론과 소론이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③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면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④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⑤ 사도 세자의 죽음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 2007학년도 6월 모의평가 17번


7.?밑줄 친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그는 본래 당색이 분명하지 않았으나 예송에 참여하면서 한쪽 붕당에서 활약하게 되었으며, 『중용』을 독자적으로 해석하는 등 주자의 학문 체계와 다른 모습을 보여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그는 북벌을 주장하면서 한때 정국을 주도했지만, 군사 지휘권의 통합을 시도하다가 반대파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이는 결국 경신환국으로 이어졌고, 그도 역적으로 몰려 사사(賜死)되었다.
① 성혼의 사상을 계승하고 노장 사상을 수용한 붕당에서 활동하였다.


② 효종에게 등용되어 이완 등과 함께 군비를 확충하면서 북벌을 준비하였다.


③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주목하여 농업 기술서인 색경을 저술하였다.


④ 인간과 사물의 본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호락 논쟁에 참여하였다.


⑤ 사회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 2012학년도 수능 12번

* 26회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④ 현종 1” 편 문제 5번


8.?다음을 주장한 학자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청이 중국을 차지하고 있으나 정세가 변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나라가 어지럽다. 우리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군사를 일으켜 청을 공격해야 한다.


○ 중용은 공자의 도를 전한 경전이며 주자가 이미 그 의미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내 소견대로 원문의 순서를 다시 정하고 재해석하였다. 이를 두고 유교 교리를 어지럽히는 행동이라고 비난해도 피하지 않겠다.


① 노론의 중심 인물로 대의명분을 중시하였다.


② 사상적 기반을 6경과 제자백가에서 찾으려 하였다.


③ 자영농 육성을 위해 토지를 재분배하자는 균전론을 주장하였다.


④ 호락 논쟁에 참여하여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하였다.


⑤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의 독자적 체계를 세웠다.

* 2010학년도 수능 15번

* 26회 “국란을 겪은 임금들 ④ 현종 1” 편 문제 7번

?


【정답 및 해설】

해설 : 정답 ④
제시된 자료에서 기묘년에 여러 정책을 추진한 사림의 대표적 인물은 조광조이다. 조광조가 활동하던 중종 때는 아직 붕당이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이다.

해설 : 정답 ①
① 사화는 훈구와 사림 세력 간의 갈등과 대립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오답 풀이>


② 북벌론은 호란 패전의 책임이 있던 서인들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③ 예송은 복상 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 간의 논쟁이었다.


④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⑤ 광해군과 북인의 중립 외교에 반발한 서인들은 인조 반정으로 집권에 성공했으나, 서인들의 친명 배금 정책은 호란을 야기했다.

해설 : 정답 ④
(가)는 영조, (나)는 정조, (다)는 숙종에 해당한다.


④ 영조는 각 붕당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 이조 전랑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 주던 관행을 없앴다.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정조 때 완전히 폐지되었다.

<오답 풀이>


① 통공 정책은 정조가 실시했다.


② 백두산 정계비는 숙종 때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궁격을 확정하여 세웠다.


③ 영조의 민생 안정책이다.


⑤ 속대전은 영조때 편찬된 법전이다. 대전통편은 정조때 편찬된 법전이다.

해설 : 정답 ④
(가)는 서인, (나)는 남인, (다)는 북인, (라)는 노론, (마)는 소론이다.


④ 호락 논쟁은 18세기 노론 사이에서 전개된 것이다. 충청 지역의 호론은 인물성이론을 주장했으며, 서울경기의 낙론은 인물성동론을 주장했다.

해설 : 정답 ⑤
제시된 자료에는 환국 발생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이 회고록의 주인공이 숙종임을 알 수 있다.


⑤ ㄷ. 숙종 시기 소론이었던 윤휴가 주장한 내용이다. 윤휴는 노론 송시열에게 사문난적으로 지목당한 바 있다. ㄹ.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숙종 때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해설 : 정답 ②
제시된 자료는 숙종에 의해 단행되었던 환국에 대한 설명이다.


② 숙종 때부터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대립했다.

해설 : 정답 ⑤
제시된 자료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 윤휴에 대한 설명이다.


⑤ 조선 후기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조선 사회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윤휴와 박세당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주자의 학문 체계와 다른 모습을 보였기 대문에 당시 서인(노론)의 공격을 받아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해설 정답 ②
제시된 자료를 통해 북벌론을 주장했고, 주자와 다른 해석을 했던 윤휴임을 알 수 있다.


② 윤휴와 박세당은 사상적 기반을 6경과 제자백가에서 찾으려 하였다. 주자가 그러했듯이 자신도 이러한 유교 원전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해석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오답 풀이>


① 송시열에 대한 내용이다.


③ 균전론은 중농학파인 유형원의 주장이다.


④ 인물성동이론에 대한 논쟁에서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한 세력은 노론 중에서도 낙론에 해당한다.


⑤ 이익의 역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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