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사회의 만남] 3. 중재자가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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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8면

1996년 3월 "인간의 뇌를 파괴하는 크로이츠펠트-야콥병(CJD)과 광우병의 관련성이 입증됐다"는 영국 정부의 발표는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소의 뇌를 스펀지처럼 만들어 죽음으로 이끄는 병원체가 인체에도 치명적인 뇌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는 논문이 몇몇 학술지에 보고되면서 '광우병 파동'을 예고하던 중이었다.

이전까지 광우병에 걸린 소가 인체에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주장해온 영국 정부였다. 그래서 정부를 믿었던 영국민들의 실망감은 더욱 컸다.

이를 계기로 과학과 사회를 좀 더 가깝게 연결할 수 있는 중재자의 필요성이 강도 높게 제기되기 시작했다. 가장 큰 피해자인 시민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95년 10월까지 영국정부의 '스펀지 형태의 뇌질환 자문위원회'에 공중보건 관련 인사가 한명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했다. 영국 정부는 이후 과학기술자문위원에 비전문가를 대거 선정하는 등 과학과 사회 사이에 '다리놓기' 작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법적으로 제도화된 중재자 또는 중재기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과학과 사회는 '일방통행'이었다. 과학기술이 국가산업 경쟁력을 배가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였던 만큼 그저 국민들에게 과학을 알리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 사실. 시민들의 의견이 과학기술 정책에 반영되는 통로는 많지 않은 편이다.

가톨릭대 이영희(과학사회학) 교수는 "수많은 연구가 국민의 막대한 세금으로 이뤄지고 있는 만큼 과학기술정책에 시민이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과학과 사회의 접점이 늘어나고 있으므로 단순한 대국민 홍보보다 시민의 참여를 제도화 할 수 있는 기구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에서 과학기술 정책을 심의하는 최고의결기구인 국가과학기술위원회(국과위), 대통령에 과학기술 관련 정책을 자문하는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기능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금까지 정부가 정책을 확정하기 전 일반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길은 공청회가 고작이었다. 공청회에 참석했던 한 시민단체 인사는 "정해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형식적인 자리였다"며 "의견을 제시하는 시민들의 의견을 '참고하겠다'로 일관해 시민들의 참여의지에 찬물을 끼얹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일본의 공청회는 적극적인 '쌍방향 통신'으로 이뤄지고 있다. 문부과학성은 공청회 한달 전 공고를 통해 개별 주제에 대한 '일반인들의 조언'을 온.오프라인으로 받는다. 공청회가 끝난 뒤 의견을 보낸 시민에게 일일이 조치사항 등을 적은 답신을 보내야 하는 '피드백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국과위와 자문회의에 참여하는 민간위원의 구성도 개선해야 할 항목이다. 민간위원에 기업체 인사와 전문가인 이공계 교수, 과학기술연구소 인사들로 이뤄져 '경제논리'가 지배할 수 밖에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좀 더 포괄적으로 정책을 정하고 자문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시민대표가 포진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내 원로 과학자들의 분발을 기대하는 목소리 또한 커지고 있다.

미국의 경우 노벨상 수상자 등 명망있는 원로 과학자들이 모여 과학기술의 오.남용을 경계하며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핵 무기 개발경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우리 과학자들은 이제 무엇을 할 것입니까. 과학은 정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진리와 평화를 위해 쓰여져야 할 과학이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그냥 앉아서 보고만 있어서 되겠습니까"라고 했던 말은 미국 원로과학자들의 머리 속에 깊이 남아있다.

과기부 문유현 정책실장은 "지난달 국과위를 통과한 2007년까지의 과학기술기본계획에서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과학기술의 역할 증대, 국민과 함께 하는 과학기술문화 확산 부문이 비중있게 다뤄졌다"며 "이 계획이 제대로 실천되면 과학과 사회를 연결하는 중재자가 곳곳에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심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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