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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괴짜들은 그렇게 월스트리트의 멍청함에 올인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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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 ‘미국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금융 사태’가 벌어졌다. 주식 시장이 무너졌고, 그 여파로 수많은 사람들이 직장과 집을 잃었으며, 전 세계 금융권이 위기를 맞았다.

미국 금융 위기 다룬 '빅쇼트'

‘빅쇼트’(원제 The Big Short, 1월 21일 개봉, 아담 맥케이 감독)는 글로벌 금융 위기가 닥치기 3년 전, 주택 시장의 몰락을 미리 예측한 괴짜 금융인들을 통해 미국 주택 시장에 나타난 재앙의 징후를 꼼꼼히 되짚는다. 그리고 금융기관의 탐욕과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이 어떤 참사를 불렀는지 보여준다. 복잡한 얘기를 쉽게 풀어내려는 시도가 탄성을 자아낼 정도로 탁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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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주택 시장이 활기를 띠던 2005년. 당시 은행들은 신용 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에게 주택 자금을 대출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를 활발히 전파했다. 그리고 이를 주택저당증권(MBS·주택을 담보로 대출금을 회수할 권리)으로 만들어 다른 금융기관에 팔며 짭짤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시장의 활황이 유지되는 한 잘못될 일은 없었고, 실제로 주택 폭락이 있을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빅쇼트’는 그와 반대로 주택 시장 붕괴를 일찌감치 예측한 괴짜 금융인들을 따라간다. 캐피탈 회사 대표 마이클 버리(크리스천 베일)는 대형 은행들이 여러 개의 주택저당증권을 쪼개서 섞어 만든 ‘부채담보부증권(CDO)’ 중 위험한 부실 채권들이 포함돼 있다는 걸 알아채고 대형 투자은행을 상대로 수년 안에 주택 시장이 폭락하는 데 13억 달러의 ‘신용부도스와프(CDS)’를 맺는다. 이 소식이 퍼지면서 은행 트레이더 자레드 베넷(라이언 고슬링), 펀드매니저 마크 바움(스티브 카렐), 전직 은행 트레이더 벤 리커트(브래드 피트)도 각자 시장 폭락에 베팅한다. 비유하자면 ‘미국 주택 시장에 대한 생명 보험’을 든 셈이다. 그러나 모기지 연체율이 늘어나 부동산 가격이 떨어져야 마땅할 때도, 주택 시장은 꿈쩍하지 않는다.

‘인사이드 잡’(2010, 찰스 퍼거슨 감독) ‘마진 콜:24시간, 조작된 진실’(2011, J C 챈더 감독) 등 여러 영화가 금융 위기를 촉발시킨 월스트리트 금융인들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를 폭로해왔다.

‘빅쇼트’는 그와 조금 달리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과 결과를 거시적으로 조감한다. 주인공들은 사건 당사자라기보다 당시 사태의 흐름을 보여주는 장기 말에 가깝다. 관객은 그들의 경험을 종합해 월스트리트의 금융 신화에 균열이 가는 과정을 지켜본다.

고로 이 영화의 과제는 명확했다. 금융 사태의 복잡한 상황과 어려운 경제 용어를 관객에게 최대한 쉽고 재밌게 이해시키는 것. ‘빅쇼트’는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발한 형식을 여럿 동원한다. 연극의 방백처럼 주인공이 직접 관객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어려운 개념을 대사나 자막 대신 여배우 마고 로비, 요리사 안소니 부르댕 등 카메오를 통해 쉬운 예로 설명하는 식이다.

정철진 경제칼럼니스트는 ‘빅쇼트’가 글로벌 금융 위기를 “더도 덜도 아닌, 있는 그대로 그려냈다”며 “경제 문외한인 스무 살 대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풀어낸 점이 놀랍다”고 평했다.

사무실에서 금융 상품을 분석해 허점을 밝히는 버리나, 현장에서 발로 뛰며 정보를 얻는 바움 등 다양한 금융인들의 삶을 충실히 재현한 점도 돋보인다. 정철진 칼럼니스트는 “여의도 ‘증권맨’이라면 ‘격하게’ 공감할 정도로 금융계를 실감나게 묘사했다”고 말했다.

원작자 루이스와 맥케이 감독이 스타를 캐스팅한 이유

이처럼 ‘빅쇼트’가 정보와 재미를 동시에 잡을 수 있었던 데에는 원작 동명 논픽션 작가 마이클 루이스(55)의 공이 크다. ‘머니볼’(2011, 베넷 밀러 감독)의 원작자이기도 한 그는 투자은행 살로먼 브라더스에서 채권 세일즈맨으로 일했던 경험을 살려 월스트리트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논픽션을 다수 저술했다.

루이스는 주택 시장 폭락을 예측했던 실존 금융인들(마이클 버리·스티븐 에이스맨·그렉 립먼)의 이야기를 토대로 책을 구상하면서,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어려운 금융 사태를 쉽게 이해시킬지 고민했다.

‘빅쇼트’의 재치와 유머는 원작에서부터 두드러지는데, “먼저 독자들을 웃게 만들면, 자연스레 진지한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는 게 루이스의 의도였다.

루이스의 책을 인상 깊게 읽은 아담 맥케이 감독은 영화화를 결심하지만, 거대한 이야기를 잘 각색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고 한다. 미국 TV쇼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SNL)’의 메인 작가로 일하며 정치 풍자를 하긴 했지만, ‘앵커맨’ 시리즈(2004~2013) 같은 미국식 코미디를 만든 감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던 그다.

그러나 브래드 피트의 제작사 플랜 B는 맥케이 감독에게 연출을 맡겼고, 그는 서너 번에 걸쳐 루이스에게 감수를 받으며 촬영했다. 실제 모델이 된 금융인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금융계의 이면에 대해 듣고 각본에 살을 붙이기도 했다.

제작자 브래드 피트가 맨 처음 출연을 결정했고, 영화의 취지에 공감한 유명 배우들이 줄줄이 참여했다. 맥케이 감독이 스타 캐스팅을 통해 바랐던 효과 역시,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관객이 더 친근하고 쉽게 사태의 전말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당시 직장과 집을 잃었지만, 대부분은 아직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언론은 이를 설명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맥케이 감독의 말이다.

이 영화는 해외 매체로부터 “금융 위기 당시의 분노와 경멸감을 날려버린다” 등의 찬사를 받았다. 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감독상·남우조연상(크리스천 베일)·각색상·편집상 등 주요 5개 부문 후보로 올랐다.

여전히 유효한 ‘빅쇼트’의 경고

곤경에 빠지는 건 뭔가를 몰라서가 아니다. 뭔가를 확실히 안다는 착각 때문이다.”

영화 첫 장면에 등장하는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의 말은 곧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2008년 금융 위기로 미국은 5조 달러의 손실을 입었고, 8백만 명이 일자리를, 6백만 명이 집을 잃었지만, 위기를 악화시킨 책임자 대부분이 처벌을 면했다. ‘빅쇼트’는 과도한 민간 대출, 금융계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 나태하고 무능한 신용 평가 기관과 감시 기관 등 금융 사태의 원인을 상세히 짚으며, 자본주의에 대한 미국 사회의 허약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우리는 금융 위기에서 배운 교훈이 전혀 없다”는 맥케이 감독의 말을 증명하듯,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문장은 이러하다.

2015년 몇몇 대형 은행이 ‘맞춤형 트랜치 기회’란 상품을 대규모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는 CDO의 또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빅쇼트’가 자본주의 사회에 울리는 무시무시한 경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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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쇼트 The Big Short
내 이름은 마이클 버리야. 캐피털 회사의 대표지. 난 사무실에 틀어박혀 수많은 모기지 채권을 일일이 분석했어. 나를 괴짜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면서. 그 결과 주택 시장의 폭락을 예상했고, 일생일대의 빅쇼트를 감행했지. 주식에서 가격이 올라가는 쪽에 투자하는 것을 롱 포지션, 가격이 떨어지는 쪽에 투자하는 것을 숏 포지션이라고 해. 고로 빅쇼트란 가격이 하락한다는 쪽에 어마어마한 액수를 베팅했다는 뜻이야. 모두들 내가 미쳤다고 생각했지만, 내 예상은 정말 멋지게 적중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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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프라임 모기지 Subprime Mortgage
난 마크 바움이요. 펀드매니저로 일하고 있지. 베넷이라는 증권가 양아치가 말하길 어떤 미치광이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일일이 분석한 결과, 주택 시장이 망한다고 장담했다더군. 서브프라임 모기지란 신용 등급이 낮은 저소득층에게 주택 자금을 빌려 주는 주택담보대출 상품이야. 부동산 주가가 치솟을 때야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품이지만, 시장이 폭락하면? 말 그대로 지구의 멸망이야. 그럼에도 망할 금융계 놈들은 다들 눈 앞의 돈만 세기 바쁘지. 난 월스트리트가 정말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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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담보부증권 Collateralized Debt Obligations
은행 트레이더, 자레드 베넷이에요. 난 월스트리트의 지질한 샌님들과는 달라요. 겁나 멋지거든요. 당신도 멋지고 똑똑한 사람일 테니 딱 한 번만 설명할게요. 부채담보부증권(CDO)은 여러 개의 모기지 채권을 잘게 쪼갠 뒤 섞어서 합친 파생 상품이에요. AA 등급 신용 채권부터 D급까지 묻지마 방식으로 섞어 팔기 때문에, 겉으론 안정적으로 보여도 실은 시한폭탄이랍니다. 난 이미 다 손을 써놨죠. 킁킁, 무슨 냄새 안 나요? 아, 바로 돈 냄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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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부도스와프 Credit Default Swap
난 벤 리커트. 은행 일에 손 뗀 지는 좀 됐어. 요즘은 애송이 투자자인 쉬플리(핀 위트록)와 겔러(존 마가로)의 자문을 맡고 있지. 걔들이 말하길, 버리라는 인간이 대형 투자 은행을 상대로 주택 시장이 망한다는 쪽에 신용부도스와프(CDS)를 맺었다는 거야. CDS는 일종의 보험 계약이야. 예를 들어 (그럴 리 없겠지만) 내가 ‘빅쇼트’가 흥행 실패한다는 쪽에 CDS를 맺는다고 쳐. 매달 거액의 보험료를 내야겠지만, 만약 영화가 망한다면 어떨까? 즉, 떼부자가 된다는 뜻이야.

글=고석희 기자 ko.seokhee@joongang.co.kr,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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