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式 勞使 협의회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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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이정우(李廷雨)정책실장이 1일 언급한 '네덜란드식 노사관계'란 네덜란드의 노사정위원회인 사회경제협의회(SER)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SER는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노사협의체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의 노사정위원회도 처음 출범할 때는 SER를 모델로 삼았다.

SER는 노사가 국가경제와 사회정책 등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 거시적 안목에서 정책의 큰 방향을 정부에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일종의 국가자문기구다.

정부는 SER에서 결정된 사안을 거의 수용한다. 아직까지 SER가 제시한 정책방향이 거부된 적은 없다.

SER는 사용자와 노조대표, 전문가 등 11명씩 모두 33명의 위원이 참여한다. 정부는 참여하지 않는다. 전문가 집단은 '크라운 멤버'라고 불리는데 이는 국왕이 추천하기 때문이다.

SER의 논의 대상은 교통.소비.복지 등 국가시책과 관련된 것이면 무엇이든 포함된다. 심지어 물가상승 목표율이나 주력산업 육성책까지 논의한다.

SER 멤버들은 공개적으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해결의 접점을 찾아낸다. 물밑협상이란 것이 없다. 노사 대표들은 서로 의견대립이 심하다고 판단하면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한다.

전문가 그룹은 노사의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가만히 있다가 이들이 조언을 구하면 그때서야 구체적인 데이터와 사례 등을 제시한다. 필요할 경우 나름의 중재안도 내놓는다. 하지만 전문가 그룹의 중재안은 노동계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한 것일 수도 있고, 사측에 유리할 수도 있다. 노사의 생각을 적당히 얼버무려 내놓지 않는다.

그런데도 노사 대표들은 대체로 전문가의 중재안을 받아들인다. 사전에 많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인식과 문제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SER 측의 설명이다.

그 바탕에는 노사 간에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디딤돌이 있다.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유럽 전역이 극심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1983년 SER는 '바세나르 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협약은 유럽식 조합주의의 성공적인 개혁 모델로 꼽힌다. 대화와 타협이 강조되고, 사회복지와 정부 개입이 중시된다.

이 협약에는 ▶임금인상 억제▶공무원 및 사회연금 동결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에 대한 저항이 심해지자 노사가 직접 나서 국민을 설득했다. 그 결과 프랑스 등이 걷잡을 수 없는 임금인상과 물가상승의 악순환에 시달릴 때 네덜란드는 오히려 생산단위당 노동비용이 하락했다. 경제회복의 틀을 잡은 것이다.

우리의 노사정위가 SER를 모델로 삼았음에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은 대립적 노사관계를 털어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뺏고 빼앗기는'식의 이분법적 문제해결 방식이 관행처럼 굳어진 것이다.

프라케 SER위원은 "끊임없는 대화는 신뢰를 쌓게 하고, 신뢰가 쌓이면 한국의 노사정위도 SER처럼 사회통합적 정책을 이끌어내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장 성공적인 노사관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네덜란드도 성장률이 1% 미만으로 떨어지고 실업률이 다시 늘고 있다. 노조가 98년 이후 임금을 크게 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기찬 기자
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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