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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훈련을 통해 이룬 ‘절권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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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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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의 마지막 영화 ‘사망유희’의 한 장면. 이 영화를 찍는 도중 돌연사했다.

이소룡(리샤오룽, 1940년 11월 27일 ~ 1973년 7월 20일)은 전통 쿵후와 현자들의 가르침에서 얻은 지식과 기술로 독자적인 무술 스타일을 개발해 전 세계에 보급했다. 무엇이든 훈련과 집중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본보기였다.

이소룡의 탄생 75주년 맞아 그의 독특한 무술 스타일을 전 세계에 보급한 여정을 돌이켜 본다

특히 그가 홍콩과 할리우드에서 찍은 영화는 홍콩의 무술 영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영화에 담긴 특성과 분위기는 이후 홍콩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무술계와 무술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치며 문화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아울러 그의 영화에서 부각된 중국의 자존심과 민족주의는 그를 홍콩의 우상으로 만들었다. 그의 탄생 75주년을 맞아 독특한 무술 스타일을 미국과 전 세계에 보급한 여정을 간략히 되짚어 본다.

이소룡은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의 중국 병원에서 태어났다. 중국 전통극 가수인 아버지가 미국 해외 공연을 하던 도중이었다. 그는 생후 3개월이었을 때 부모와 함께 홍콩으로 돌아갔다.

이후 홍콩에서 성장하면서 거리 싸움에 숱하게 휘말리며 경찰에 연행되기도 했다. 무술에 관심이 많던 그는 엽문의 제자로 영춘권을 배웠다.

아들의 앞날을 걱정하던 부모는 1958년 그를 미국으로 보내 자신들의 오랜 친구와 지내도록 했다. 이소룡은 단돈 1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잠시 지낸 후 이소룡은 시애틀로 옮겨 역시 아버지의 친구였던 루비 차우의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학교에 다녔다.

미국에 간 지 1년 뒤인 1959년 이소룡은 자신의 무술 지식을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친구들 사이의 비공식적인 대련으로 시작된 것이 도장 3곳의 사업으로 커졌다. 그 과정에서 그의 획기적인 격투기 접근법 ‘절권도’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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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은 길거리 싸움의 경험을 살려 독자적 무술 ‘절권도’를 개발했다

당시 19세였던 이소룡은 시애틀의 에디슨 기술학교에 다니면서 무술 시범을 보이다가 첫 제자를 맞았다. 그는 대련 상대를 고르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제임스 드밀(24)을 발견했다.

드밀은 미국 공군의 헤비웨이트 복싱 챔피언 출신이었다. 이소룡은 그의 건장한 체격을 보고는 무대로 불러 올렸다. 드밀은 이소룡을 상대하기는 누워 떡먹기라고 생각했다. 키 170㎝에다 몸무게는 64㎏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순식간에 드밀을 눕혔다. 그의 무술에 반한 드밀은 제자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이소룡은 이런 공개 시범을 통해 소수의 제자를 모았다. 그들은 그가 식당 루비 차우에서 웨이터 일을 마친 뒤 그 앞에서 수련했다. 드밀은 이소룡에게 자신의 스승인 다키 ‘다쿠아키’ 기무라(38)를 소개했다. 일본계 미국인인 기무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의 일본인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자신감을 잃었다.

기무라는 브루스 토마스가 쓴 전기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Bruce Lee: Fighting Spirit)’에서 이렇게 돌이켰다.

동네에서 몇 안 되는 일본인 가정에서 성장한 나는 차별을 많이 받았다. 수용소에서 나왔을 때 식당에 가도 주문을 받지 않고 버스에서 좌석에 앉을 수도 없었다. 6개월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해 떠돌이 생활을 했다. 내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기무라는 수용소에서 유도를 배웠다. 그러나 드밀과 친구들은 그에게 이소룡의 무술 시범을 한번 보라고 권했다.

기무라는 “그보다 나이가 많고 노련한 무술가를 일본에서 봤기 때문에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시범을 보고는 제자들과 함께 수련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의 속도와 힘보다는 사상이 더 대단했다.”

제자가 계속 늘어나자 이소룡은 1963년 시애틀 워싱턴대학 캠퍼스 부근에 준판쿵후도장을 열었다. 그들은 시애틀의 KCTS 채널9에서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TV 촬영이 늘 계획대로 되진 않았다. 제자이자 유도 선수인 제시 글로버는 예행 연습을 했지만 잊어버리고 실수로 이소룡의 얼굴을 쳤다. 그러자 그는 바로 글로버를 때려 눕혔다.

드밀은 ‘이소룡, 세계와 겨룬 영혼의 승부사’에서 이렇게 돌이켰다.

그는 ‘내가 가르쳐줄 것은 이것이다. 받아들여라. 나도 열심히 수련해 발전하겠다’고 말했다. 내가 그의 철학과 무술 기술을 많이 배운 건 행운이었다. 난 그의 무술이 너무 좋았다. 그동안 그는 더 많은 유연성과 힘, 강도를 개발하며 진화했다. 그의 시애틀 시절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자세와 기법을 실험한 시기였다.”

이소룡은 무술의 기초를 모르고 수련을 게을리하는 제자는 가차없이 내쫓았다. 그의 도장에 오는 수련생 대다수는 유도나 가라테, 복싱을 어느 정도 했다.

하지만 준판 쿵후도장의 수련은 지옥훈련이었다. 강도 높은 복근 단련과 끊임없는 팔동작 훈련으로 포기하는 제자가 속출했다.

반면 그의 지도로 계속 수련한 제자들은 그와 대련할 때 기초 훈련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다(그는 자주 제자들과 대련했다). 이소룡은 린다 에머리와 결혼한 직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로 자리를 옮겼다.

중국인 무술가 제임스 임 리도 합류했다. 리는 20세 연상이었지만 곧 친구가 됐고 보조 사범으로 일했다. 그들은 1964년 오클랜드에 도장을 세웠다. 그러자 중국인 무술가들이 분노했다.

한 적수와 대결한 후 이소룡은 자신의 약점을 깨닫고 길거리 싸움의 경험을 살려 독자적인 무술 ’절권도’를 개발했다.

절권도는 ‘날아오는 주먹을 막는 법’이라는 뜻이다. 영춘권, 홍가권, 공력권, 복싱, 태권도에 펜싱의 스텝을 차용해 만든 종합 무술이다. 그는 격투에선 전통적인 무술 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즉흥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믿었다.

몇 달 뒤 그는 댄 이노산토를 보조 사범으로 로스앤젤레스에도 도장을 차렸다. 그러나 여전히 앞길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진판쿵후도장을 미국 전국 체인으로 만들지 아니면 배우의 길을 갈지 고민했다.

결국 이소룡은 영화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술을 전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도장 3곳을 각각 기무라, 리, 이노산토에게 물려줬다. 기무라와 이노산토는 아직도 이소룡의 절권도를 가르친다.

글= JAMES ELLIS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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