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두텁고 다채로운 한국 모노크롬에 반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2면

기사 이미지

지난 9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튀렌가 ‘갤러리 페로탱’에서 ‘오리진’ 전을 둘러보는 관람객들. 이승조의 방은 그의 ‘핵’ 연작이 내뿜는 힘으로 후끈했다.

‘때가 왔다. 쇠도 뜨거울 때 때려라.’ 새해 한국미술계는 단색화(單色畵, DANSAEK HWA)의 세계 미술시장 진출 총력전으로 날이 밝았다.

파리서 최명영·이승조·서승원 3인전
전시장 인파 몰려 문 못 닫아
“한국작가 계속 발굴하고 싶다”
런던·LA·뉴욕서도 전시회 잇달아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을 비롯해 유럽과 미주 곳곳에서 단색화 대표 화가들과 그 이후 세대들의 개인전과 그룹전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다. 2014년 하반기에 시작된 단색화의 갑작스런 부상은 1년여의 가열기를 거쳐 거침없이 만개하는 모양새다.

1960년대 시작됐으나 국제적 주목에서 비켜난 채 50여 년 묵혀있던 한국 모더니즘 미술이 뒤늦게 재발견되는 현장은 자못 감동스럽다.

 지난 9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 튀렌가의 ‘갤러리 페로탱’. 전시장으로 밀려드는 인파로 문을 닫을 새가 없다. ‘오리진-최명영 이승조 서승원’ 3인전 개막식은 프랑스 미술계 인사들의 찬사로 시작부터 뜨거워졌다.

피에르 캉봉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색의 감각이 환상적이다. 두텁고 다채로운 한국 모노크롬 계열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즐거워했다.

서울에 지점을 낼 만큼 한국 작가들을 평가하는 화랑 대표 에마뉘엘 페로텡(48)은 “미국 모더니즘 맥락에 집어넣을 수 없는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한국 단색화와 그 이후 세대 작품을 계속 발굴하고 싶다”고 의욕을 보였다.

 이 전시는 원로 화가 박서보(85)씨로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뉴욕 페로탱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연 그에게 페로탱 대표가 작가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박씨는 “한국에는 나 정도 그리는 화가가 발에 채일 정도로 많다”고 설명하며 6명을 꼽아줬다. 그중 대표가 세 명을 골랐는데 우연히도 홍익대 61학번에 미술동인 ‘오리진 회화협회’의 창립 멤버였다.

낙점된 고 이승조(1941~90), 최명영(75), 서승원(74)씨는 그림 그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서 죽어라고 작품에 매달렸던 공동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꿈에도 그리던 파리 데뷔를 죽어서 실현한 이승조 화백은 유족이 고이 보관해온 작품과 일화들로 관람객들 관심을 모았다. 고인의 딸인 이지은(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아키비스트)씨는 미술자료연구자로서 선친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아버지에게 그림은 신앙이었고 작업은 구원이었다. 할머니가 가게 판돈을 등록금하라고 주자 그걸로 모두 물감을 샀을 정도”라고 전했다. 롤러나 스프레이를 쓰지 않고 오로지 붓을 들고 캔버스에 맞섰던 그의 ‘핵(核)’ 연작은 검은색임에도 시퍼렇게 빛난다. 붓질을 같은 곳에 수없이 반복해 정련한 그 화면은 보는 이를 내밀한 세계로의 미립자 여행을 떠나듯 도취시킨다.

 최명영씨는 “당대에 우리는 뭔가 자생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절박함에 시달렸다. 숨 쉬는 호흡처럼 그리고 싶었다. 모두들 긴 생명력의 회화를 갈구했고 각기 훌륭한 세계를 창조했으나 그때는 국력이 약했다. 이제 시작”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이어 14일(현지시간) 런던 ‘화이트 큐브’에서는 박서보 화백의 ‘묘법 1967~1981’ 전이 시작됐다. 16일 오후에는 로스앤젤레스 ‘블럼 & 포 갤러리’에서 ‘단색화와 미니멀리즘’ 전이 막을 올린다.

3월 12일까지 이어질 이번 전시는 한국의 단색화와 미국의 미니멀리즘 회화를 나란히 조망하는 첫 자리다. 한국에서 권영우(1926~2013)와 윤형근(1928~2007), 정상화(84)·박서보·하종현(81)·이우환(80)씨가, 미국 쪽에서 도널드 저드·솔 르윗·리처드 세라 등이 초대됐다.

한국의 단색화와 미국 미니멀리즘과의 미적 유사성과 차이점을 비교 연구할 수 있는 최초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오는 5월에는 뉴욕 ‘블럼 & 포 갤러리’에서 권영우의 첫 북미 개인전이 열린다. 윤형근 화백의 개인전은 2월 4일부터 한 달 간 벨기에 앤트워프의 ‘악셀 베르보르트 갤러리’, 오는 10월 중순부터 런던의 ‘사이먼 리 갤러리’에서 한 달 간 이어진다.

파리=글·사진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오리진(Origin) 회화협회=1963년 창립한 우리나라 현대미술운동 그룹. 이승조·이두식·최명영·서승원 등 20대 초 청년 화가들이 앵포르멜과 미니멀리즘 등 모더니즘 미술의 다양한 회화 사조 방법론을 실험하고 제시하며 활동했다. 그룹 이름 그대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의 기원, 근원을 파헤치는 자신들의 조형이념을 정기 회원전으로 발표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