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난다’ 1970~80년대 대학가엔 시국 낙서…‘불온 내용’ 누명 씌워 징역형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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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문교부 당국자 ‘불순세력 편승 우려 일부 대학서 불온 낙서 발견’.”

 1984년 4월 13일 한 일간지 사회면에 실린 기사 일부다. 70~80년대 대학가의 벽면은 이처럼 시국을 걱정하는 대학생들의 낙서로 가득 찼다. 정권을 규탄하거나 암울한 사회상을 개탄하는 낙서는 ‘불온 낙서’로 낙인찍혔다.

같은 시기 서울대 중앙도서관 벽면엔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난다’ ‘반제국주의 타도’ 같은 낙서가 발견되기도 했다. 전북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유오근씨는 76년 교내 화장실에 불온 낙서를 남긴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필적 감정 과정에서 구타 등을 당한 사실이 밝혀져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국가기록원 홈페이지엔 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정부가 광주시장에게 ‘불온 전단 및 낙서 제거 지시’ 공문을 보낸 흔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낙서는 더 이상 정치의 영역이 아니다. 감시나 처벌의 대상도 물론 되지 않는다. 청춘들의 낙서엔 사회상을 비판하거나 정치 현실을 걱정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 학업이나 직장 문제 등 개인적 고민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서강대 전상진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청춘들의 낙서에 사회가 아닌 개인의 문제가 많이 담긴다는 건 청년의 삶을 떠받치는 사회구조가 허술하다는 방증”이라고 지적했다.

손국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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