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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치에도 아름다움, 인격적 완성, 윤리의 공간 있을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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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0호 28면

일러스트 강일구 ilgook@hanmail.net

정치 공간은 공공 윤리에 의하여 지탱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여러 작은 요인들도 작용한다. 앞에서 우리는 헬무트 슈미트 독일 전 총리를 평가하는 언론의 한 칼럼 제목이 ‘우아함과 힘’이었다고 소개했다. 정치가 힘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칼럼의 제목에 나온 우아함은 슈미트의 경우 주로 개인적 특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말이었겠지만,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 행동의 질을 높이는 한 성향을 말한다고 할 수도 있다. 정치가 피할 수 없는 것이 폭력이라고 하더라도, 우아함 또는 아름다움이 정치에 들어갈 수 있다면, 그것은 그 폭력적 성격을 완화하게 될 것이다.


막스 베버가 그리고 있는 지도자상은 민주주의의 지도자를 생각하면서도, 유럽 중세 기사도의 어떤 면에 대한 그의 찬탄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기사는, 적어도 베버의 단순화된 이미지에서는, 프라이드나 명예욕과 같은 자기존대의 욕망을 가지면서도 그것에 더하여 심미적 태도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이 추구하는 세속적 목표에 대하여 초연함을 유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기사 그리고 중세 봉건 체제하의 귀족들은 그들의 목적의 달성, 즉 권력의 확보에 급급하지는 아니하였다. 삶에 소명이 있다는 생각도 그들의 마음으로부터는 먼 것이었다. 그들은 주어진 삶의 자족성을 받아들였다. 행동은 그 자체로 완전하여야 마땅했다. 기사도에서 무술은 전투의 수단이면서 심신을 단련하고 완성하는 수단이었다. 그리하여 그것은 예술이 되고 게임이 되었다. 그 세계에서 사치도 그 아름다움으로 중요시되는 것이지 반드시 과시의 수단이 되지는 아니하였다. 다시 말하여, 모든 행위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 예술적 우아함이 중요하였다.(기사의 세계를 공리적 이성의 세계로 쉽게 옮겨가지 못하게 한 것도, 심미적 가치에 대한 존중에 관계된다고 베버는 말한다.) 


정치 공간에 있어서도 예의가 필요분명하게 표현되지는 아니하더라도 삶의 방식에 스며 있는 심미주의는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인격 완성을 위한 간단없는 노력을 말하는 것이지만 그 윤리적 이상이 심미적 비유를 통하여 표현되었음에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자르고 쓸고 쪼고 간다”는 것은 상아, 돌 또는 옥을 아름답게 조각하는 행위를 두고 말한 것이다. 이런 비유로 미루어 보면 인격 수양이 심미적 완성을 포함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자가 시경(詩經)에서 인용한 이 문구는 오만하지 않고 겸손한 행동, 무엇보다도 예의 바른 행동을 몸에 익히는 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핵심은 예(禮)이다. 예는 윤리적 의미 또 종교적 의미를 갖는다. 윤리적·정신적 의미를 아름답게 양식화된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예 또는 예의였다.


심미적인 요소는,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중요한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정치 행위가, 그리고 모든 인간의 사회적 행위가 목적과 결과로 구성된다면 두 요소 사이에는 간격이 있고, 이 간격을 메우려는 것이 정치 행동 또는 인간 행위이다. 강제력이 끼어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정치 행위라고 할 때, 이러한 간격은 강제력이 작용할 공간을 넓히는 것이 될 수 있다. 베버가 우려하는 바, 지나치게 먼 미래를 지향하는 계획 또는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인 이념은 이 강제력을 정당화하기 쉽다. 목적과 결과의 간격은, 그것을 단축하여도, 본질적으로 비인간화의 가능성을 갖는다. 이 간격을 메우는 것이 실천 행위이다. 이 실천 행위에 강제력 또는 폭력이 끼어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필요한 것은, 목적과 결과의 간격을 차지하는 실천의 과정을 다스리는 규범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을 목표하는 것은 적어도 실천 행동에 하나의 지표를 주는 일이다. 아름다움은, 피아노 연주의 경우에 보는 바와 같이, 멀리 있는 목적에 의하여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공연의 현재 속에 표현된다.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예는 이러한 공연의 현재성을 갖는 윤리 행위이다.


그러나, 다시 역전하여, 아름다움의 이상은 정치를 빗나가게 할 수도 있다. 아름다움이 오로지 현재의 행동에 주의를 집중한다고 하면, 그것은 미래를 지향하는 정치 계획이나 목적을 정치 밖으로 밀어낼 수 있다. 이것은 아름다운 행동으로서의 예가 공허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데에서도 볼 수 있다. 허례허식(虛禮虛飾)은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이다. 이 허례허식의 느낌이 강해지는 것은 체제의 전체적인 변화의 필요가 강하게 느껴지는 때이다. 그러나 예 또는 예의가 평화적 인간 관계를 위한 중요한 매체인 것은 틀림이 없다. 사람이 함께 만날 때,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언제나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의견들의 충돌이 빈번할 수밖에 없는 정치 공간에도 해당되는 일이다. 물론 그것은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지도자의 깊은 인간적 자질에서 나오는 것이라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의견의 충돌은 사회의 다른 부분 간의 힘과 이해관계의 충돌일 수 있고, 삶의 근본적 의미에 대한 이견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나 혁명의 경우가 아니라면, 이러한 충돌을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할 것이다. 그 동기에는 두려움이나 손익 계산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인간적인 경우는 갈등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에 기초하는 경우이다. 두려움이나 손익 계산까지도 사실은 이러한 존중에 연결되어 있다. 나의 생명에 대한 존중, 또는 인간적 존엄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두려움도 계산도 무의미하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얼른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람의 의식의 맨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에게 본능적으로 구조의 손을 내밀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맹자의 유명한 관찰이다. 다른 관점에서 말하자면,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의 능력은 대체로 인간이 가진 근본적 능력이다. 이 능력으로 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입장을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옮겨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서로 마주보게 되는 사람들은 대체로 상대방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입장이 달라 서로 맞서게 되는 사람들이, 같은 인간이고 인간적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최선의 경우이다. 조금 더 좁혀서는 그것은 같은 집단의 인간 또는 민족의 구성원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심리적 자원들은 이성적 훈련을 통하여 개발되고 의식화되어야 한다. 그런 경우,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포괄하는 최선의 정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 결과로서 타협점을 찾는 것이 용이할 것이다.


‘숙고의 민주주의’는 최선책을 찾기 위한 것민주주의에 대한 반성적 검토를 시도하는 근래의 정치이론에 나오는 말 가운데 ‘숙고(熟考)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회가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치 과정에 다수결 이상의 신중한 생각을 도입하는 민주주의 체제를 말한다. 최선의 정책을 찾는데 필요한 것이 숙고의 과정이다. 이 숙고의 과정이 어떻게 현실의 정치 기구에 도입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많은 문제는 행정적으로 또는 기술적으로 전문적인 해결을 요구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전문가들의 지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전해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말 가운데에 “머리는 빌려 쓰면 된다”는 것이 있다. 정치 지도자는 머리의 인간이라기보다 그것을 빌려 쓰는 사람이다. 머리를 빌려 쓰는 데에도 물론 머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상식 또는 양식(良識)에 입각하여 사실을 가늠할 수 있는 머리를 말한다. 기술적 정보가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정보의 인간적 의미, 윤리적 의미를 보다 넓게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양식이다. 베버가 말했던 바 정치 지도자가 지녀야 하는 판단력이란 정치 행동의 시의(時宜) 적절성을 헤아리는 능력이다. 그것으로 지도자는 정치 행동과 현실의 관계를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능력은 다시 한 번 기술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양식 또는 인간적 지혜를 말한다. 물론 이러한 정치지도자의 양식을 뒷받침하는 것은, 되풀이하건대, 사회 전반의 지적인 수준, 윤리적 수준이다. 학문의 발전과 공공질서 안에서 유지되는 윤리 의식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심미의식의 향상과 보편화에 의하여 보완될 수 있다. 여기에서 예술과 문화의 건전성이 중요해진다. 그 기반 위에서 행동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조화를 향하는 것이 된다.


 정치는 공적 행복의 바탕 제공해야아름다움은 그 자체로도 삶의 보람을 드높인다. 아름다운 몸가짐은 그 자체로 사람을 기쁘게 한다. 아름다운 언어도 우리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평화의 이상에 귀 기울일 수 있게 한다.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그것이 진과 선과 하나가 될 때, 사람들은 삶이 보여주는 참담한 요소들에도 불구하고 삶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 해야 할 과제와 의무는 해야할 것이면서도 마음을 어둡게 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이것을 완화한다.


정치 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미국독립혁명의 주요 인물이고 제2 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함께 행동하는 것을 보이게 하자”는 말에 정치 행동의 중요한 의미가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오비디우스의 시에서 인용한 것인데, 이 “스펙테무르 아겐도(spectemur agendo)”라는 말의 원뜻은 대체로 말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아렌트는 그에 못지않게 “보여준다”는 데에 의미를 부여했다. 정치는 공공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정치가들은 서로 경쟁한다. 그것은 권력을 향한 경쟁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스스로의 뛰어난 인간됨됨이를 단련한다. 여기에서 서로 국민에게 보여주려는 의지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도자의 뛰어남은 물론 그 나름으로 완성감을 지향한다. 그러면서 그 뛰어남은 경쟁 대결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정치 공간-그럴듯한 정치 공간을 구성한다. 아렌트에게 정치의 중요한 기능은 인간의 공적 완성 그리고 공적 행복의 바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가족, 친구와 이웃 그리고 나의 ‘사적인 행복’의 문제는 뒤로 밀려난다. 아렌트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조금 기이해 보이는 생각이지만 그는 정치의 중심이 민생에 놓이게 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회의 가치 기준을 소비와 치부(致富)로 옮겨가게 하고 공적 탁월성을 향한 인간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한다. 완전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어떻게 생존의 기본 요건이 해결되지 않고 보다 원숙한 인간의 공적 탁월성에 대한 관심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경제를 등한히할 수는 없다. 그렇기는 하나 경제가 사회와 인생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정치 문화에 아름다움과 인격적 완성과 윤리가 존재하고 번영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있어서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의 삶의 필요에 대한 대책도 시행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슈미트 전 총리의 사거는 정치에 있어서 카리스마의 문제와 함께 보다 넓은 정치 문화의 문제들을 생각하게 한다.


김우창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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