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됐어요 … ‘공룡박사’ 자폐 윤석씨의 웃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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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28일 서울 대현동 오티스타 사무실에서 자폐인 디자이너 5명이 각자 디자인한 작품을 들어 보이고 있다. 왼쪽부터 김승태씨·이소현 교수·조상협씨·정윤석씨·천재윤씨. 앞에 앉은 사람은 손기택씨. [강정현 기자]

“이 공룡은 ‘트리케라톱스’예요. 트리케라톱스는 세 개의 뿔이 있어요.”

[연중기획] 매력시민-세상을 바꾸는 컬처디자이너
2016년을 말하다 - 편견 딛고 부르는 희망가
디자인 사회적 기업 ‘오티스타’
정직원 12명 중 7명 자폐인 채용
개인별 재능 살려 사회 공헌 기회
대인기피증 혼자 밥 먹던 우진씨
요즘에는 회식 날짜만 기다려

 지난해 12월 28일 오후 서울 대현동에 위치한 디자인 기업 오티스타 사무실. 디자이너 정윤석(20)씨가 연필로 공룡의 밑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직원들 사이에 정씨는 ‘공룡 박사’로 통한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자폐 증상을 보였다. 그 때문에 사람들과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공룡 지식만큼은 전문가 수준이다. 알파벳 A부터 시작해 Z까지 온갖 공룡의 영문 철자를 줄줄 꿸 정도다.

 4년 전 자폐인 정씨의 남다른 재능을 눈여겨본 이가 있었다. 오티스타 설립자인 이소현(56) 이화여대 특수교육과 교수다. 이 교수는 자신이 운영하는 디자인 스쿨에 다니던 정씨를 발탁해 오티스타의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자폐인이 기업에 정직원으로 채용된 건 매우 이례적이다. 자폐인의 경우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규칙적인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일반 직원들과 정씨가 함께 근무하도록 배려했다. 특수교육 전공자를 채용해 정씨의 의사소통을 돕도록 했다. 그 결과 정씨는 정식 디자이너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정씨는 자신이 잘 아는 공룡들을 디자인으로 표현한다. 그가 그린 디자인이 새겨진 볼펜·가방 등이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정씨는 “출근은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말했다.

 디자인 기업 오티스타에서 4년째 ‘아름다운 실험’이 진행 중이다. 자폐인을 정직원으로 채용해 한 명의 사회인으로 길러내는 이 실험은 시민 사회에 잔잔한 울림을 주고 있다. 오티스타는 가방·공책·폰 케이스 등 디자인 상품을 판매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이곳의 정직원은 설립자 겸 대표인 이소현 교수를 포함해 총 12명. 이 중에서도 정씨 같은 자폐인 디자이너가 7명이다.

 자폐(自閉)는 세상과 단절되기 쉬운 장애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선천적으로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해서다. 오티스타는 이런 인식의 장벽에 맞섰다. 자폐인일지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주면 사회에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자폐인 디자이너 양우진(21)씨 역시 정직원으로서 성과를 내고 있다. 양씨는 대인기피증이 심한 편이었다. 4년 전 처음 오티스타에 왔을 땐 다른 직원이 근처에 오기만 해도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곤 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 그림을 그리면서 점차 직장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양씨는 어떤 형태의 디자인이든 창의적으로 동물에 접목시킨다. 직원들이 그만의 독특한 디자인에 관심을 보이자 양씨도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다. 양씨의 한 직장 동료는 “우진씨는 처음엔 밥도 혼자서만 먹을 정도로 회사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는데 지금은 회식 날짜만 손꼽아 기다리는 넉살 좋은 동료가 됐다”고 말했다.

 변화는 자폐인 디자이너들의 부모에게도 생겨났다. 천재윤(22)씨의 어머니는 아들이 정상적인 사회 구성원이 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자폐 증세가 심해 10분도 한 자세로 앉아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천씨가 오티스타에 입사한 뒤 자유자재로 컴퓨터 편집 프로그램을 활용하게 됐다. 천씨가 첫 월급을 받던 날 어머니는 “우리 아들의 재능을 정작 엄마인 내가 몰라봤다”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한때 아들의 장애를 부끄러워했던 우원경(27)씨의 아버지도 “말 한마디 나누는 것도 불편했는데 매일 아들의 도시락을 챙겨 줄 정도로 변했다”며 “어엿한 직장인이 된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자폐인은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지만 특정 분야에 비범한 재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며 “오티스타가 모델이 돼 자폐인들이 각자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글=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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