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임진왜란 ‘혼용무도’의 시대에 조선엔 현신 류성룡이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기사 이미지

칼날 위의 역사
이덕일 지음, 인문서원
328쪽, 1만7000원

교수신문 선정 2015년 사자성어는 ‘혼용무도(昏庸無道:리더의 무능함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짐)’였는데, 역사학자 이덕일의 신간 『칼날 위의 역사』는 그 의미를 실감나게 한다. ‘혼용’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지칭하는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을 함께 일컫는 표현이다. 저자는 조선시대를 소재로 오늘을 되돌아보게 한다.

 조선시대의 혼용 사례로 저자는 선조·인조·고종 등을 열거한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요동으로 피신하려 했다. 그만큼 전황이 심각했다. 조선 백성의 일본군 가담이 속출하며 그 수가 일본군 절반이나 된다는 소문을 선조도 듣는다. 병역·조세 제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고 저자는 본다. 양반은 예외로 두고 가난한 농민에게 병역과 조세 부담을 과도하게 지우는 상황에서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백성들이 관공서를 불태우고 일본군에 가담해버렸다는 것이다. 천만다행인 것은 영의정 류성룡이 전시 정책을 지휘하며 즉각 병역·조세 개혁에 나선 점이다. 양반도 병역 의무를 지는 속오군(束伍軍)을 조직했고, 일종의 ‘부자 증세’인 작미법(作米法)을 도입했다. 이같은 개혁에 민심이 돌아왔고 조선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의 망한 나라를 살려놨지만 전쟁 끝 무렵 양반들은 류성룡을 낙마시키며 개혁 조치를 폐기시켜나갔다.

 그 결과 임진왜란 끝난 지 30년도 안 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했을 때 농민들은 의병 모집에 응하지 않았고, 인조는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했다. 임금이 혼용일 때 탁월한 현신(賢臣)이 있으면 위기를 극복한다. 고종은 급진 개화파와 온건 개화파를 모두 제거하며 개혁의 동력을 상실했고 결국 망국의 황제로 전락했다.

 시사 주간지 연재물을 다시 책으로 묶어냈기에 일부 내용의 중복이 보인다. 42편의 글 모음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원수들과 정사를 논해야 했던 정조, 정적의 과거를 기억하되 처벌하지 않으면서 미래지향적 개혁을 꿈꿨던 현군(賢君)을 통해 오늘의 과제를 제시한 점도 돋보인다.

배영대 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