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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 요약 (24)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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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호 1 면

선조는 학문을 좋아하고 예술에도 능한 임금이었다. 『열성어필(列聖御筆)』에 실린 선조의 그림과 글씨. 제목은 난죽도(蘭竹圖). 동아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선조가 태어날 때만 해도 그가 임금이 되리라고 여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종의 7남인 덕흥군(德興君) 이초(李초)의 셋째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회세자(順懷世子)가 명종 18년(1563)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 하성군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명종은 후사를 낳지 못했고 재위 22년(1567) 6월 다시 병이 들었다. 『선조실록』은 “이준경이 울면서 중전에게 대계(大計)를 청하자 중전이 ‘을축년(명종 20년)에 정한 바대로 하려고 한다’고 전교했다”고 쓰고 있다. 하성군으로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선조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사림의 지지를 획득했으나 사림은 곧 분열되었다. 선조 8년(1575:을해년) 삼사(三司)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吏曹銓郞) 문제로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동인과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갈렸는데, 이것이 을해당론(乙亥黨論)이다. 율곡 이이(李珥)는 두 당을 화합시키려는 조제론(調劑論)을 제기했으나 동인들에게서 거듭 공격을 받고 본의 아니게 서인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 초기에 선조는 서인 편을 들었다. 이황이 재위 3년(1570) 사망한 후 이이가 사림의 영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듬해(1584:갑신년) 이이가 사망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선조의 마음이 변한 것을 간파한 동인은 공세에 나섰다. 홍문관에서 심의겸을 공격하자 선조는 직접 전교를 내려 심의겸을 파직시켰다. 명종의 유조도 없었던 하성군을 임금으로 만들어 준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은 이렇게 조정에서 쫓겨났다.


이이의 천거를 대부분 수용했던 선조는 정여립에게는 내내 비판적이었다. 이런 와중인 선조 22년(1589) 10월 2일 황해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狀啓)가 도착하면서 유명한 정여립 사건이 시작된다. 역모 고변은 황해도 감사가 했는데 그 괴수는 전라도에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혹이었다. 국왕 선조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 파악에 주력해야 했으나 사림에 대한 콤플렉스와 정여립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겹쳐 그럴 생각이 없었다.


서인 강경파 정철(鄭澈)이 “역적을 체포하고 경외(京外)에 계엄을 선포하자”는 비밀 차자(箚子:약식 상소문)를 올리자 선조는 그 충절을 칭찬하고 사건 조사를 담당하는 위관(委官:국문 수사 책임자)으로 삼았다. 진상이 모호한 사건의 조사를 정적들이 맡았으니 가혹한 고문이 자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으로 동·서인은 서로 적당(敵黨)이 되었다. 그러나 이면에는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임진왜란에 대해선 현재까지 두 가지 오해가 있다. 하나는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일본군이 느닷없이 부산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통신사 부사(副使)였던 김성일(金誠一)의 ‘일본은 침략하지 않을 것’이란 보고 때문에 전쟁에 대비하지 못했다는 인식이다. 둘은 결국 ‘조선은 일본이 침략할 줄 몰랐다’는 것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일본이 침략하리라는 증거는 수도 없이 많았다. 세종 25년(1443) 변효문(卞孝文)이 조선통신사로 다녀온 이래 무려 150년 만인 선조 23년(1590) 3월 정사 황윤길(黃允吉), 부사 김성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가 파견된 것 자체가 일본이 공언(公言)하는 침략 의사가 사실인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대마도주 소 요시시케(宗義調) 부자에게 명나라를 공격할 길을 조선에 빌리라는 ‘가도입명(假道入明)’과 조선 국왕을 일본으로 오게 하라는 ‘국왕 입조(入朝)’의 명령을 내렸다. 소 요시시케는 도요토미가 조선통신사를 직접 만나면 두 개의 요구조건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를 알리라는 생각에서 조선에 거듭 사신을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다. 조선은 소 요시시케에게 선조 20년(1587) 2월 흥양(興陽)을 침범해 녹도보장(鹿島堡將) 이대원(李大源)을 전사시킨 왜구 두목과 조선인 사화동(沙火同)을 압송하고, 붙잡아 간 조선인들을 송환시키면 통신사를 파견하겠다고 답변했다. 사화동은 고된 부역과 공납(貢納)으로 바치는 전복(全鰒)의 수량이 지나치게 많다면서 일본으로 귀화해 왜구를 손죽도로 안내한 조선 백성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2년(1589) 7월조는 일본에서 긴시요라(緊時要羅) 등 3인의 왜구와 사화동, 그리고 조선 포로 김대기(金大璣) 등 116명을 돌려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만큼 대마도주는 조선통신사 파견에 사활을 건 것이었다. 그래서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그 대가로 일본으로 떠났던 것이다. 정사를 서인 황윤길, 부사를 동인 김성일로 삼은 것은 선조 나름의 탕평책이자 다양한 시각을 접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당파 차이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랐다. 황윤길은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한 반면 김성일은 일본을 오랑캐로 여기는 유학자의 시각으로 일본을 얕보았다.


통신사 일행은 수많은 고생 끝에 4개월 만인 1590년 7월 말 교토(京都)에 들어갔으나 도요토미는 통신사를 즉각 만날 생각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받은 도요토미의 국서(國書)도 문제투성이였다. ‘조선국왕 전하(殿下)’라고 써야 할 것을 ‘합하(閤下)’라고 쓰고, 조선의 선물을 ‘예폐(禮幣)’라고 써야 하는데 신하가 임금에게 바치는 예물이란 뜻의 ‘방물(方物)’이라고 쓴 것 등이 그것이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겠다면서 조선이 군사를 내어 도우라는 구절이었다. 『국조보감』은 김성일이 겐소(玄蘇)에게 강하게 항의해 몇 구절을 고쳤다고 전하면서 “황윤길 등은 ‘겐소가 그 뜻을 달리 해석하는데 굳이 서로 버티면서 오래 지체할 것이 없다. 빨리 돌아가자’고 말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두 사람은 사행(使行) 기간 내내 서로 다투었다. 황윤길이 무기(武氣)가 충만한 일본의 숭무(崇武) 분위기에 겁을 먹었다면, 김성일은 오랑캐의 허풍에 지나지 않는다고 얕보았다. 두 사람은 선조 24년(1591) 정월 귀국하는데 황윤길이 도요토미에 대해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고 보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았는데 두려워할 위인이 못 됩니다”고 달리 보고했다.


『선조수정실록』 24년(1591) 3월조는 일본 회례사를 만난 선위사(宣慰使) 오억령(吳億齡)이 “내년에 (조선의) 길을 빌려 상국(上國)을 침범할 것이다”는 회례사의 발언을 보고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자 조정은 ‘인심을 소란시킨다’면서 오억령을 심희수(沈喜壽)로 갈아치웠다. 조선 지배층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국왕 선조는 침략 경고를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때 왜가 침범하리라는 소리가 날로 급해졌으므로 임금이 비변사에 명령해 각기 장수가 될 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하셨다”고 적고 있다. 선조는 전쟁 대비에 나섰던 것이다. 이때 이순신을 천거한 류성룡은 “이순신이 드디어 정읍 현감에서 전라좌수사(水使)로 발탁되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선조 24년(1591) 2월인데, 이순신의 발탁에 대해 사간원은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다”며 강하게 반대했다. 선조는 “이러한 때에 상규(常規)에 얽매일 수 없다. 더 이상 그의 마음을 흔들지 말라”고 막아 주었다. 『선조수정실록』 25년(1592) 2월 1일자는 “대장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여러 도에 보내 병비(兵備)를 순시하도록 하였다”고 전하는데 이 역시 선조가 전쟁 대비책을 지시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신립이 4월 초하루에 사제(私第:집)로 찾아왔기에 “머지않아 변고가 있으면 공이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할 터인데, 공의 생각에는 오늘날 적의 형세로 보아 그 방비의 어렵고 쉬움이 어떠하겠는가”라고 묻자 신립이 “그것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고 대답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가 임란 발발 열이틀 전이었다. 류성룡이 “지금은 왜적이 조총(鳥銃)과 같은 장기(長技)까지 있으니 가벼이 볼 수는 없을 것이요”라고 거듭 말하자 신립은 “비록 조총이 있다 해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일축했다. 도요토미는 자신의 공언대로 400여 척의 배를 띄워 보냈다.

정여립이 자결했다는 전북 진안 죽도의 전경. 죽도에 서실이 있어 ‘죽도 선생’이라 불린 정여립은 성리학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혁신적 사고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충북 진천에 있는 정철 신도비각. 사진가 권태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군사체제는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였다. 외침(外侵)이 있을 경우 수령들은 군사를 이끌고 배정된 지역으로 가서 대기하다가 조정에서 파견되는 경장(京將)의 지휘를 받아 싸우는 제도였다. 군사를 총 집결시켰다가 경장의 지휘로 단번에 적을 섬멸하려는 계책이지만 반대로 패전하면 더 이상 대책이 없다는 결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임란 6개월 전인 선조 24년(1591) 10월 좌의정 류성룡은 진관제(鎭管制)로 바꾸자고 건의했다.


일본군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1군 1만8000,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2군 2만2000,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3군 1만1000 명 등 도합 16만8000여 명의 대군이었다. 4월 14일 부산진성의 수군첨절제사 정발(鄭撥)은 1000여 명에 불과한 병력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의 대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었다.


류성룡이 『징비록』에서 “신립이 대궐 문 밖에 나가서 직접 무사를 모집했으나 따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라고 전하는 대로 군사도 없었다. 중종 때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가 실시되면서 양반 사대부들은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일반 백성들만 납부의 의무를 지게 된 것이 주요인이었다. 지배층의 군역이 면제된 판국에 피지배층이 목숨 걸고 체제를 위해 싸울 이유가 없었다. 『선조수정실록』은 “류성룡이 모집한 장사(壯士) 8000명을 신립에게 소속시켜 떠나게 했다”고 적고 있는데, 이렇게 급모한 군사들이 조선 병력의 전부였다. 신립은 기병(騎兵)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들판을 전지(戰地)로 택한 것인데 4월 27일 탄금대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네 차례나 격퇴했으나 끝내 패전하고 자결했다. 충주에 무혈 입성한 고니시와 가토는 서울 진공 계획을 짰다. 『선조실록』 25년 4월 28일자는 “충주에서 패전 보고가 이르자 상이 대신과 대간을 불러 입대케 하고 비로소 파천(播遷: 임금의 피란)에 대한 말을 발의하였다”라고 전한다.


선조의 파천 발언이 알려지자 도성에는 큰 소동이 일었다. 정상적인 국가체제는 이미 붕괴한 것이었다. 더 큰 문제는 백성들의 동향이었다. 류성룡은 “적이 성문을 지키면서 우리 백성들에게 적첩(賊帖)을 휴대하게 하고 출입을 금하지 않았다”라고 전해 준다. 백성들이 일본이 발행한 새 신분증을 가지고 살아갔다는 뜻이다. 선조가 “내부(內附)하는 것이 본래 나의 뜻이다”라고 말했으나 류성룡은 거듭 안 된다고 반대했다. 내부란 명나라로 도주해 붙겠다는 뜻이었다. 선조는 망명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영의정 최흥원이 “요동으로 들어갔다가 명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하자 선조는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는 반드시 압록강을 건너갈 것이다”(『선조실록』 25년 6월 13일)라고 답했다. 선조는 그해 5월 윤두수에게 “적병이 얼마나 되던가? 절반은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라고도 물었다. 조선 백성이 대거 일본군에 가담했다는 정보가 횡행했다. 선조 25년 6월 평양성이 함락되면서 조선은 곧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음 달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와 구키 요시타가(九鬼嘉隆)가 이끄는 115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의 주력을 궤멸시키면서 회생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로써 곡창지대인 호남이 안전하게 됨으로써 일본군은 본토에서 직접 군량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다. 선조 26년(1593) 1월에는 명장(明將) 이여송(李如松)이 조명(朝明) 연합군을 이끌고 평양성을 탈환했다. 선조도 그해 10월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이런 전세의 역전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 것은 의병들이었다. 의병 기의(起義)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사림의 솔선수범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정 겸 도체찰사 류성룡이 주도한 개혁 입법이었다. 임란 이후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의령(宜寧) 유생 곽재우(郭再祐)였다.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 등도 곧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들은 모두 남명 조식(曺植)의 제자들이었다. 곽재우의 의병은 2000명, 정인홍은 3000명, 김면은 5000명으로 경상우도의 의병만 1만 명에 달했다. 의병을 일으킨 사림들은 먼저 사재를 털어 무기와 식량을 마련하고 의병소(義兵所) 또는 의진소(義陣所)·의승소(義勝所)라고도 불렸던 지휘부를 구성해 체계를 마련했다. 사대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살아나면서 의병이 모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류성룡은 개혁 입법으로 의병 활동을 북돋웠다. 류성룡은 ‘함경도 감사와 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에서 “출신(出身:과거 급제 후 출사하지 못한 사람)·양반(兩班)·서얼(庶孼)·향리(鄕吏)·공천(公賤)·사천(私賤)을 논할 것 없이 군사가 될 만한 장정은 사목(事目:규칙)에 의거하여 모두 대오(隊伍:군대)로 편성하라”고 명했는데 과거 군역에서 면제되었던 양반들도 속오군(束伍軍)에 편입시켰다.


양반의 종군(從軍)은 당연한 의무였지만 천인의 종군에는 대가가 따라야 했다. 그래서 만든 법이 면천법(免賤法)이다. 공사(公私) 천인(賤人)도 군공(軍功)을 세우면 양인(良人)으로 속량시켜 주고 벼슬까지 주는 법이었다. 이제 천인도 군공을 세우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노비가 대거 종군하게 된 것은 면천법 덕분이었다. 류성룡은 조세제도 역시 혁명적으로 개혁했다. 류성룡이 주장하는 혁명적 세제 개혁안이 훗날 대동법(大同法)이라고 불렸던 작미법(作米法)이었다. 공납(貢納)의 폐단을 조세 정의에 맞게 개혁한 법이 작미법이다. 면천법으로 노비를 의병으로 끌어들이고, 작미법으로 가난한 백성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조선은 회생하고 있었다.


선조도 국망이 목전에 다가왔던 임란 초에는 개혁입법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먼저 ‘전쟁영웅 제거’가 시작되었다. 육전 영웅 김덕령 죽이기는 수전 영웅 이순신 제거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순신 제거 작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한반도 남부 일대를 점령한 일본과 명(明) 사이의 강화협상이 전개되었다. 도요토미는 선조 30년(1597) 정월 다시 대군을 보내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정유재란의 승패가 이순신 제거에 달렸다고 판단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간자(間者:간첩) 요시라(要時羅)에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어느 날 바다를 건널 것’이라는 역정보를 조선에 제공하게 했다. 유인책으로 간주한 이순신이 움직이지 않자 선조와 서인은 이순신 제거의 기회로 삼았다. 선조는 이순신을 압송해 형문(刑問)하게 하고 원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게 했다. 27일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던 이순신은 류성룡과 정탁(鄭琢) 등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백의종군에 처해졌다. 원균은 선조 30년(1597) 6월과 7월 한산도와 칠천도(七川島)에서 거듭 대패해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그 자신도 전사했다. 선조는 할 수 없이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삼았으나 수군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수군 해체령을 내리고 이순신을 육군으로 발령했다. 『이충무공 행록(行錄)』은 이때 이순신이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으니 사력을 다해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설령 전선 수가 적다 해도 미신(微臣:미천한 신하)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 적이 감히 모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라고 장계했다고 전한다.


정유재란도 처음에는 임란 초기처럼 일본군의 우세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충청도 직산에서 명군이 일본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제해권을 되찾으면서 다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선조 31년(1598) 8월 18일 도요토미가 병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 등 이른바 사대로(四大老)는 8월 28일과 9월 5일 조선 출병군의 철수를 명령했다. 이렇게 종전이 기정사실화되자 다시 전쟁영웅 제거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번 대상은 류성룡이었다. 양반의 특권을 크게 제한한 류성룡의 전시 개혁입법을 폐지하고 ‘특권만 있고 의무는 없는’ 양반 사대부의 천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공세였다.


선조는 몇 번 반대의 제스처를 취한 후 류성룡을 버리는데, 그가 파직된 선조 31년(1598) 11월 19일은 이순신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날이었다. 이순신의 전사와 함께 7년 전쟁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당연히 전공자 포상이 뒤따라야 했다. 그러나 선조는 명나라 제독 유정(劉綎)에게 “우리나라가 보전된 것은 순전히 모두 대인(유정)의 공덕입니다”(『선조실록』32년 2월 2일)면서 임란 극복이 명나라 덕이라는 궤변을 만들어냈다. 선조 37년(1604)에야 우여곡절 끝에 겨우 공신이 책봉되는데 문신들인 호성(扈聖)공신이 86명인 데 비해 일본군과 직접 싸운 무신들인 선무(宣武)공신은 18명에 불과했다. 호성공신 중에선 내시(內侍)가 24명이고 선조의 말을 관리했던 이마(理馬)가 6명이나 되었다. 선무 1등인 이순신·권율·원균은 모두 사망한 장수들이었는데 당초 2등으로 의정되었던 원균은 선조의 명령으로 1등으로 올라갔다. 선조는 류성룡의 정적이던 서인·북인과 손잡고 류성룡의 전시 개혁입법을 모두 무력화했다. 이렇게 조선은 다시 전란 전으로 회귀했다.


- 이덕일,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 제106호 2009년 3월 22일, 제107호 2009년 3월 29일, 제108호 2009년 4월 5일, 제109호 2009년 4월 12일, 제110호 2009년 4월 19일, 제111호 2009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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