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7)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 『봉선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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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영화계이야기를 대강 끝냈으니 이번에는 서양음악을 주로하여 악단을 훑어보기로 한다.
어느 해였던지 시일은 분명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일제말의 어느날, 부민관에서 김천애의 독창회가 있었다. 동경에서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나온 소프라노 김천애는 그때 인기의 절정에 있어서 넓은 홀이 남녀 청중으로 꽉 메워져 있었다. 하얀 치마 저고리의 한복을 입은 김천애는 청중의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고 무대에 나타나더니 난데없는 『봉선화』를 불렀다.
울 밑에 핀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장내는 별안간 엄숙해져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노래가 끝나자 청중의 열광적인 박수는 오랫동안 그칠줄 몰랐다.
나라를 뺏긴 민족의 설움을 호소하는것 같은 이 애절한 노래는 일본 경찰이 독립만세를 부르는것과 못지않게 싫어해서 사사로운 자리에서도 못 부르게 금지하여 왔다. 그런것을 공개무대에서 부르다니 일본 경찰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김천애는 이런사정을 알고 있으므로 프로그램에는 넣지 않아 검열을 통과시킨 다음 일부러 이 『봉선화』 노래를 전격적으로 부른 것이었다.
이 노래를 작곡한 사람이 난파 홍영후였다. 그는 1897년 수원에서 출생하였는데, 세브란스 의전교수였고 이비인후과 전문의였던 홍석후의 아우였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질을 나타낸 그는 당시 우리나라에 있어서 유일한 음악교육기관이었던 조선정악부습소의 양악부를 나온 후 일본에 건너가 상야음악학교에 들어가서 2년동안 수학하였다. 학비부족으로 귀국하였다가 다시 1920년 동경에 가서 그 학교에 재입학 수속을 밟았더니 그동안 1919년의 독립만세에 가담하였다고해서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에 분격해 서울에 돌아온 그는 김형준의 노래 『봉선화』에 이렇게 곡을 붙여 울분을 풀었다. 초라한 울타리 밑이나 쓸쓸한 화단 한 모퉁이에서 모진 비바람을 겪으면서도 한여름동안 빨갛게 피어 있는 봉선화. 그것은 어떤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않고 살아가는 민족의 의기를 보여준것이라고 볼수도 있었다. 이 노래는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순식간에 퍼져 일종의 애국가 행세를 하였다. 그래서 일본 경찰이 이 노래를 몹시 싫어하고 그것을 부른 김천애를 잡아간 것이었다.
홍난파는 그 뒤 타고난 문재를 발휘해 시와 소설을 썼고, 김동인등의 동인잡지 『창조』에도 작품을 발표하였다. 동시에 「연악회」라는 음악단체를 조직해 조카 홍성유·홍재유형제와 김형준의 딸 김원복과 함께 음악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그때는 서양음악에 대한 이해가 너무 없어 바이얼린을 서양 깡깡이라고 멸시했고, 심지어는 노인 아버지까지도 집안이 망하다고 호령호령을 하였다. 다행히 형 홍석후의 이해가 있어 겨우 버텨나갔으나 선각자의 활동은 언제고 이런고난을 겪게 마련이었다.
홍난파는 이런 고난을 무릎쓰고 세상 사람을 계몽하기 위하여 음악회를 열어보려고 애썼다. 그래서 김형준·김영환·최호영등 당시 양악계의 선구자들과 의논해 어느날 단성사에서 낮에 공연회를 열어보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모여든 청중은 남녀 합해서 일곱명밖에 없었다. 20년대 중간의 우리나라 양악계는 이런 비참한 상태에 있었다. 이 때문에 홍난파는 빚만 지고 실망에 빠져 있었다. 1년 걸려 2백여원의 빚을 갚은 다음 불사조같은 홍난파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어 두번째로 동경 유학의 길에 올랐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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